오페라 하우스에 불빛이 켜지고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기다리는 아들이 안 온다. 시드니 시내에서 친구들과 저녁 식사 후 오페라하우스 공연장 앞에서 만나기로한 약속이다. 거의 도착했다는 전화를 끊고 나니, 멀리 젊은 무리가 뛰어온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어머니!"
시드니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온 아이들이 인사하며 우리 부부 앞에 둥글게 섰다. 생각지 못한 한국 청년들과 만남에 반가워심장이 두근거린다. 아직 앳된 모습의 남자아이들은 꾸벅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 온 친구 부모에게 인사하러 시내에서부터 지하철로 와주었다는 말에 짠함과 고마움이 뒤엉킨다. 해외로 나와 고생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서 다행이고, 서로 격려하며 도움을 주는 사이라 그저 고맙다. 아들을 대하는 마음으로 손을 맞잡고 어깨를 토닥인다.
"애쓰네. 잘 있어서 고마워. 건강 잘 챙겨야 해."
8시 되기 10분 전, 서둘러 공연장 안으로 입장했다.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며 좌석을 찾았다. 시드니 교향 관현악단의 공연이다. '미사이공' 뮤지컬을 관람하고 싶었지만 공연 일정이 얼마 전 마감되었다. 관람할 수 있는 요일과 시간을 선택할 여지가 없어 아쉬웠지만, 내부 입장할 기회에 그저 감사했다. 무엇보다 세 명이 공연장을 누리기에 비용도 적절했다. 아들은 적은 용돈으로 오페라 하우스 공연은 꿈꾸지도 못했단다. 건물 바깥만 구경하고 돌아갔다 하니 말이다.
공연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뒤편에 관객들과 마주 보는 특별한 좌석이었다. 나중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지휘자 맞은편 좌석은 아주 저렴해서 가난한 유학생도 가능하다고 한다. 정작 호주 시민들중에 오페라하우스 공연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가까이 있는 귀한 것도 관심 두지 않으면 누릴 수 없다. 내 것이 되려면 방법을 찾고 적극적으로 한 발 내 디뎌야 한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싶기도 했고, 아들과 셋이 함께 하는 추억을 더 갖고 싶었다. 공연장 좌석에 나란히 앉는 것도 오랜만이다.
바로 옆에 홀로 앉은 금발 중년 여성은 공연 내내 음악에 심취해 넋이 나간듯한 표정을 지었다. 스카프와 핑크빛 낮은 구두로 멋을 낸 의상에서부터 공연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대체로 많은 관중이 자유스러운 복장으로 입장했다. 아들은운동화를 신었고 우리 부부도 관광 중에 입장한 터라 캐주얼한 옷차림이었다.드문드문 양복을 차려입거나 우아한 정장 옷차림을 택한 여성들도 있었다. 옷차림이 마음 자세인 것 맞다. 그네들의 모습은단정한 옷매무새만큼 공연에 대한 기대가 많고 차분하다.
편하고 부드러운 지휘자의 손길과 배려는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뒷모습으로도 보였다. 마법사의 주문 손동작 같은 지휘자의 손끝으로 한 곡씩 긴 공연을 만들어갔다. 공연 중 관객의 기침 소리마저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플루트와 피아노 독주가 이어지는 부분에서 미세한 소리도 멀리까지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지휘자는 긴 연주가 한 곡씩 끝날 때마다 잠시라도 독주하며 수고한이를 일으켜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쉼 없이 달리던 공연이 끝나자, 오케스트라 악기 구역별로 연주자들을 세워 관객의 박수를 나눠주었다. 자랑스러워하고 격려해 주려는 리더의 배려 깊은 행동들. 연륜 있고 여유 있는 지휘자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 주목해 보게 되었다. 박수를 일으켜 연주자 각자에게 안겨주고 그 순간을 행복하게 누리는 리더. 그는 연주 내내 신나는 어깨춤을 추었다. 즐거움은 뒷모습으로도 보이는구나. 아들과 지휘자의 리더십을 이야기 나누었다.
오르간과 타악기는 자신의 박자를 기다렸다가 딱 그 박자에 할 일을 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바이올린과 첼로와는 달리 한가할 수 있지만 끝까지 악보를 놓치지 않고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혼자의 소리가 아닌, 함께 소리를 만들기 위해 각각 다른 음색으로 하나를 만든다. 캐스터네츠와 탬버린의 경쾌한 소리까지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이들의 하나 됨이 놀라울 뿐이다. 2부에는 피아노가 더해지면서 진짜는 후반이었음을 관객도 느끼게 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을 이끄는 것은 지휘자의 손끝이었다. 시작과 강약, 흐름의 정도, 들어가고 멈추는 박자까지도 인도한다.
1부와 2부 사이 쉬는 시간에 모두 공연장 밖으로 나가 휴식했다. 연주자는 악기 정비와 휴식을 위해, 관람자는 다음 공연을 누리기 위해 콧바람을 쏘이고 웅크렸던 몸을 편다. 공연장 계단을 올라 하버브리지가 보이는 발코니에 섰다. 조명을 켠 유람선이 항구를 오가고 주변 상가와 높은 건물의 불빛은 화려하게 반짝인다. 하버브리지 깜빡이는 불빛은 음악으로 촉촉이 젖은 감성으로 바라본 때문인지더 아름다워 보인다.
남편은 오페라하우스 내부 구경을 서둘러 나섰다가 돌아왔다. 곳곳을 사진 찍으며 바쁜 걸음으로 다녔는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내가 본 건물 중에 최고야.”
"입사 면접에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물이 무엇인지 물어서 오페라하우스라고 답했잖아."
한껏 신난 아이가 친구에게 말하듯 아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낸다. 공연장 천정의 방음 시설과 좌석 배치, 오페라 하우스 지붕과 내벽까지도 놀라움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화장실에 들었다가 오페라하우스 지붕처럼 하얗고 둥근 흐름이 이어진 세면대마저도 아름다운 예술로 여겨졌다.
피곤한데도 졸지 않고 2부까지 집중해 공연을 누리는 아들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초등학생이던 아이들 위해 뮤지컬과 음악회를 부지런히 데려가도 관심 없다는 듯 잠들던 아들이었는데 말이다. 부모 덕분에 이런 기회를 누릴 수 있어 감사하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아들도 많이 컸나 보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밖으로 나오니 밤 10시 반이다.
“많이 피곤하세요? 야간에 페리를 타면 정말 멋져요. 멋진 항구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좀 늦어져서 밀슨포인트 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집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오~! 좋지. 안내해 주시게."
잡고 있던 남편의 손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아들은 우리에게 멋진 곳을 보여주겠다고 신난 목소리로 그의 안내를 시작한다. 계획되지 않은 일정에 피곤은 눈꺼풀 끝까지 올랐지만, 들썩거리는 아들의 어깨를 뒤따른다. 낮에 많이 걷느라 부은 발바닥은 신경을 끈다.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혼자서 낮에 둘러본 여행 코스이지만 모른 척한다. 아들의 기특한 마음이 예쁘고, 뒤늦게 시드니에 도착해 코스가 생경한 남편이니 속으로만 웃으며 입을 꼭 다문다.
루나 파크까지 운행하는 페리에 올랐다. 아들은 갑판에서 우리 부부의 사진을 연속으로 찍어준다. 카메라를 들어 작게 반짝이는 오페라 하우스를 뒷배경으로 넣고 우리 셋 얼굴도 넣어본다.
피곤으로 더 마른 듯한 남편과 오랜만이라 어깨가 더 커진 아들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두 남자가 나란히 항구를 걷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뒤따르면서 자꾸만 영상과 사진을 촬영한다. 이런 모습은 믿기지 않아서 꼭 찍어 남겨야만 한다는파파라치처럼.
새벽 한 시, 리버스톤 역에 도착했다. 온몸은모래주머니를 발등에 올린 것처럼 움직임이 둔해도 땀으로 젖은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났다.
남편이 보여준 공연에 감사인사하던 아들의 목소리, 아들이 보여준 야경에 고맙며 어깨를 토닥이던 남편의 손짓이 침대에 누워서도 떠올랐다. 자꾸 웃어서 눈꼬리도 아프고 입꼬리도 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