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호주 여행
새벽 다섯 시 반, 어제저녁 마트에서 사 둔 현지 청정우를 굽는다. 종일 움직일 여행을 위해 아침부터 든든히 배를 채운다. 여행도 밥심이다. 특히나 해외로 여행할 때면 기회 닿는 대로 음식을 먹어 에너지를 비축하게 된다. 객사를 두려워하는 생존 본능인가. 햇반을 데우는 동안 노릇하게 고기를 구워 샐러드와 한 접시에 담는다. 캐리어에 담아 온 작은 김치 팩도 꺼내 둥글고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렸다. 다 먹고 나면 왠지 잘 걸어 다닐 것만 같다.
여섯 시 반, 쌀쌀한 바깥 날씨를 대비해 얇은 흰 스카프를 두툼하게 두르고 청재킷을 걸쳤다. 하얀 운동화에 플리츠스커트를 입으니 움직임이 편하면서도 거울 속 모습이 제법 괜찮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의상은 상하의 돌려서 매칭하기 좋은 것들로 챙겨 온다. 물론 움직임이 편한 것으로만 담아왔다. 스카프와 모자 그리고 작은 가방은 부피가 작아도 멋짐을 더하는 데 최고다. 때로는 여행 중 차려입어 보고도 싶다. 오늘처럼 멋진 곳이라면 사진과 어울릴만한 복장을 하여본다.
아직 어둑한 바깥을 서둘러 걸으며 하늘을 살핀다. 하늘에 둥근 물체가 움직인다. ‘도시 한복판에 열기구라고?’ 여러 개의 열기구가 가까운 하늘 위를 움직인다. 나중 살펴보니 멜버른 도심 열기구가 여행 상품 중에 제법 유명하다. 아침부터 신기한 물체로 기분부터 신나는 여행이다. 눈은 하늘을 감탄하면서 손과 발은 부지런히 앞뒤로 움직인다. 바쁘다.
빅토리아 주립도서관 근처에 서 있는 커다란 단체 버스에 올라탔다. 이미 꽉 찬 버스. 모두 어디에 흩어졌다 모였는지 멜버른을 관광하던 부지런한 한국인으로 버스 빈 좌석은 단 두 곳이다. 멜버른 시내를 벗어나 끝없는 벌판으로 이어진 길을 달린다. 풀로 가득한 언덕, 마음대로 자라고 있는 가로수. 잠들기에 아쉬운 시간이라 멜버른의 시골도 눈에 담는다. 한참을 달리니 좌측 창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인다. 모두 핸드폰을 열고 영상과 사진을 촬영한다. 우측 창에 앉아 다른 편 창을 촬영하는 안타까운 마음. 좀 더 일찍 와서 자리를 차지했으면 좋았겠지만, 우측 창 손님에게도 좋은 타이밍이 있겠지.
가이드는 멜버른 바다 이야기, 도로 이야기, 동물과 식물 이야기를 이어간다. 지루하고 긴 시간을 메꾸느라 한국인 젊은 가이드가 애쓴다. 호주인이 먹지 않는 전복을 따느라 경찰에 소환된 한인들 이야기에 탄식했다가 새벽에 가게 문을 열고 오후 세 시면 닫는 가정에 충실한 호주 가장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도 했다. 거대한 호주 토끼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 전쟁 같은 포획 작전을 펼쳤다는 이야기에 졸다가 눈을 떴다. 캥거루 전쟁, 토끼 전쟁이라니. 경이로운 자연환경으로 가득한 땅이다.
두 시간 반을 달리니 ‘GREAT OCEAN ROAD' 새겨진 간판이 보인다. 이 길고 긴 도로를 닦느라 희생하고 애쓴 수많은 이들의 공로를 새긴 크고 평평한 바위를 발견했다. 무엇이든 수고로 얻어지는 것이구나. 좋은 것을 누릴 때 고생한 이들을 자꾸 떠올리리. 기억해 주는 일이 지속될 때 존재는 길이길이 남는다.
잠시 버스에 내려 해변을 걷는다. 분홍색 운동복 바지를 입고 뱅 앞머리를 한 긴 파마머리 여학생이 혼자 사진을 찍느라 애쓰고 있다. 핸드폰을 건네받아 그녀의 귀여운 포즈를 이리저리 담아주었다. 부끄럼 없이 온몸을 사용해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귀엽고도 부럽다. 혼자 여행 다닌 지 일주일 넘었다는 그녀는 오히려 우리 부부의 사진을 더 많이 더 멋지게 찍어주었다.
“혼자서 여행하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데요. 저도 좋아해요. 끝까지 잘 누리세요.”
고생했는지 풀 죽었던 그녀는 활짝 웃으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부산 송정해수욕장을 떠올리는 해변을 잠시 누리다가 진짜 목적지로 다시 향한다. 이건 잠시 맛보기란다.
바다가 멋지니 차창으로 별장처럼 보이는 하얀 주택들이 이어진다. 휴양지로 딱 맞겠다.
해안이 거대하니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 거품의 너비가 넓고 길다. 길가로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 중인 왕관 쓴 비둘기 떼가 보이고, 긴 연못에는 흑조 떼가 보인다. 백조 아닌 흑조를 빨리 찾으려 유리창에 얼굴을 딱 붙인다. 새로운 땅에는 식물과 동물도 새롭다. 관찰자의 자세로 무엇이든 살펴보아서인가 보다.
가이드의 안내로 코알라를 보기 위해 잠시 휴게소에 내렸다. 가이드들끼리 연락망을 주고받은 바로는 휴게소 옆 큰 나무에 코알라 한 마리가 출현했단다. 이제는 쉽게 만나기 힘든 녀석인가 보다. 높디높은 유칼립투스 두툼한 나뭇가지에 조용히 앉아 뒷모습을 보이는 코알라 한 마리가 보인다. 한참 기다리니 오른발을 들어 몸을 긁는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멈춘 뒤 몸을 비틀어 앞모습도 보여준다. 덩치 큰 코알라의 엉덩이와 등을 나무 아래 서서 구경했다. 이렇게 코알라를 만나는 것도 행운이란다. 귀하다 하니 귀하게 보인다. 희소성의 가치라고 할까나. 그리 생각하면 나도 귀하고 너도 귀한데.
한 시간을 다시 달려 오전 11시, 다시 바닷가 휴게소에 멈춰 점심을 먹었다. 골라준 몇 개 식당 중에 중식당을 선택했다. 마파두부와 치킨을 주문하고 연두색 기다란 중식 젓가락으로 낯선 음식을 입에 넣는다. 온몸에 피곤이 앉아 맛을 모르겠다. 남은 20분 동안 바닷가 작은 동네를 구경했다. 바로 옆 선물 가게에서 그레이트 오션 로드 사진엽서를 구입했다. 여섯 장에 5불. 사진으로 미리 보는 12 사도상은 벌써 거대하다. 마음에 드는 풍경 사진을 구입해 작은 바다로 향한다. 두 명의 서퍼들이 마음껏 누비며 뒤집고 있는 작은 바다. 이 또한 두 해 전에 방문했던 동해 장호항 떠올리게 한다. 어디서든 내 나라를 기억한다. 쥐꼬리만 한 비슷함만 있어도.
PORT CAMPBELL 국립공원 표지판이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의 거친 해안선 곁에 저마다 모습으로 웅장하게 서있는 12 사도상(Twelve Apostles)을 드디어 만난다.
모두 서둘러 버스에서 내린다. 발걸음이 급하다. 진짜 호주 관광이다. 드넓은 바다 곳곳에 심긴 거대한 바위. 거센 해풍과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이천 만 년 동안 깎이고 남은 조각과 절벽이 거대한 자연의 역사를 보여준다. 두 눈은 최대한 크게 뜨고 넋이 나간 듯 바다 이쪽 끝부터 저쪽 끝을 훑는다. 여기저기에 서 있는 인간들은 감탄사만 내뿜을 뿐 자연의 경이로움에 기세가 눌린 모양이다.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구경한다면 더 멋지겠지만 가까이 해풍을 맞으며 파도 소리 들으며 관광로를 따라 걷는다. 거리와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이는 12 사도상의 조화. 에메랄드 빛 바다와 어우러진 영화 같은 장면을 보고 또 바라본다.
가만히 멈췄다. 핸드폰을 들어 찍은 장면을 찍고 또 찍는다. 원거리 장면도 남기고 줌으로 당겨 가깝게도 사진 찍어 본다. 어쨌든 장면을 남기겠다는 욕심으로 자꾸만 영상을 찍고 사진을 담는다. 긴 머리카락이 자꾸만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귀 뒤로 날리는 옆머리를 넘기고 머리카락 붙잡아 누르느라 바쁘다. 사진 속에도 여러 장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붙들고 있다. 그래도 멋있기만 하네. 곳곳에 펼쳐진 라임스톤 벼랑은 영화배경 장면인 듯 장관을 이룬다. 아름다운 장소인 만큼 담고 있는 사연과 이야기도 많다.
수 천만년 동안 서서히 이루어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다섯 시간 넘게 다리를 꼬며 달려온 시간이 이제야 아깝지 않았다. 대 자연 앞에 점 같이 작은 인간의 형체를 세워보고야 한없이 작고 겸손해진다. 오랜 기간 서서히 이루어진 자연의 인내와 변화는 결국 아름다운 자취를 남겼다. 종국에는 무너지고 파괴되어 작아지고 소멸해 가는 바위겠지만 지금까지 버텨온 묵직함과 기다림을 마음에 배우고 눈에 담아 돌아간다.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는 기회에 두 손 모아 감사했다. 눈 감으면 다시 보이고 들리는 파도. 그래, 그레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