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씻으며 하얀 비누를 사용할 때마다 곱슬머리에 짧은 중절모를 썼던 사사프라스 마을 호주 할아버지의 유쾌한 걸음이 떠오른다. 여행 중에 가져온 물건이나 특별한 선물은 건네준 이를 기억나게 한다. 장식장에 매달린 토분 모빌을 보며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한국인이 반갑다며 덤으로 선물 준 가게 주인 할아버지를 추억한다. 이솝 핸드워시를 사용하면서는 결혼한다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던 제자를 생각한다. 기분 좋은 순간을 떠올리며 선물을 사용한다. 그래서,중요한 사람에게 선물을 전달할 때는 고민을 많이 한다. 좋은 기억과 미소를 함께 포장하는 것이기에.
10월이 끝나가는 날이었다. 멜버른 숙소 깨끗한 침대에서 깊은 잠을 잤다. 오전 7시, 햇반과 뜨거운 물을 붓기만 하면 되는 미역국을 준비하고 일 회분씩 돌돌 말아 포장된 여행용 김 한 봉지와 볶음김치 한 팩을 꺼냈다. 부엌 찬장마다 하얀 그릇과 투명 유리잔으로 잘 채워져 있어 식탁은 금세 한국 밥상이 된다. 어젯밤 미리 준비해 둔 편한 옷을 꺼내고 쌀쌀한 가을 아침에 대비해 돌돌 말아둔 하얀 스카프를 캐리어에서 꺼냈다. 서둘러 설거지하고 오늘의 여행을 시작한다.
30번 트램에 올랐다. 이번에도 파란 유니폼을 입은 여성 기관사다. 알록달록하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열어 일정을 살피는데 맞은편 유모차에 돌이 막 넘은듯한 아기가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다. 아이들이 어릴 적 보던 ‘텔레토비’에 등장한 아기 해님의 웃음이다. 긴 여행으로 피곤함에 찌든 얼굴을 들킬까 싶어 얼른 입꼬리를 올려 최대한 활짝 펼쳤다. 웃음을 주고받은 아기와 동양인 아줌마의 모습을 보면서 유모차를 붙잡고 서 있던 아기 아빠도 웃음을 터뜨린다. 내 옆에 앉았던 남편도 덩달아 함께. 미소에는 미소로 답하는 것. 아무래도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옆에서 모이기로 한 단체 버스를 타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트램이 지나고 자동차가 달리는 한가한 아침 멜버른 도로변이다. 맞은편에 소복처럼 온통 하얀 의상을 입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여성이 넓은 보폭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얼굴은 온통 하얀 분칠에 입술과 볼에 핏빛 그림을 그렸다.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데 놀라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니 아주 바쁜 듯 걸음이 빠르다. 생각해 보니 핼러윈데이. 미니버스에 탄 단체 관광객을 담당한 한국인 가이드가 말했다.
“시내를 벗어나 외곽에 있는 마을에 가면 핼러윈데이로 장식한 집들이 아주 멋져요. 벤틀리와 사우스 야라 마을은 특별히 예뻐서 우버 택시로 관광할 수도 있어요. 핼러윈 데이에 외출한다면 집에 방문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탕을 대문 앞에 마련해 둔답니다. 저도 아이가 셋인데 사탕이랑 초콜릿을 많이 준비해 두었지요. 코스튬 준비하느라 대형 마트에도 다녀왔어요. 핼러윈 코스프레에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진심이에요.”
‘토마스와 친구들’의 모티브가 된 퍼핑 빌리에 가기 위해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미니버스는 한 시간을 달렸다. 드넓은 잔디와 들판을 달리고 키가 큰 유칼립투스 가득한 숲을 빙글빙글 돌아 산악지대를 오른다. 단데농 산맥 해발 500미터를 오르는 중이었다. 오전 열 시 반, 산 동네 작은 사사프라스 마을에 버스가 잠시 멈췄다.
“한 시간 동안 아기자기한 산속 마을을 자유 관광하세요. 이곳에는 멋진 가게들이 많은데요. 영국식 추리소설 주인공 이름을 딴 ‘미스 마플스’ 티룸은 열한 시에 문을 엽니다. 그곳은 라즈베리 잼을 올린 스콘과 와플이 맛있어요. 동네에 티포트 가게와 작은 갤러리 그리고 분재를 파는 가게 등 볼거리가 많아요. 자, 그럼 미니버스는 열한 시 반에 출발하겠습니다.”
깊은 산속에 작은 가게들은 파스텔톤으로 페인트칠하고 좁은 도로변을 따라 양옆으로 옹기종기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핼러윈 장식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동화 같은 분위기가 더해졌다. 작은 서점에 들어가 책을 구경하고 예쁜 원피스와 모자를 전시한 옷 가게도 들러보았다. 장난감 가게, 문구점을 지나서 넓은 골동품 가게 입구에 환영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환영합니다. 쇼핑만 하지 말고 경험도 하시죠.”
혹시 문을 열었을까 확인하려 입구에 들어가는데 아침 시간에 어울릴 법한 가볍고도 흥겨운 음악이 흐른다. 쇠로 된 장식품이 예쁘게 색칠되어 가게 울타리마다 걸려 있고 온갖 종류 동물상이 정원 수목들과 어우러져 자리하고 있다. 챙이 짧은 중절모를 쓰고 긴 빗자루를 든 할아버지가 유쾌한 말로 ‘굿모닝’ 한다. 피에로처럼 곱슬머리와 날씬한 몸을 한 그는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정장 조끼를 단정하게 입었다.
“잠깐 구경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안으로 들어와 보면 더 많은 물건이 있어요.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코리아요.”
“여기 한국 물건도 있어요. 이리 와 봐요.”
불상과 동양화도 있다. 호주 산속에서 만나는 수묵화라니.
집을 개조한 방마다 장식품과 세계 미술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신기한 것은 부지런한 그의 모습만큼이나 수많은 작품이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 정돈되었다. 편히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라면서 그는 정원 마당으로 나가 비질을 시작한다. 영상으로 가게를 촬영하다가 음악 소리와 박자에 맞춰 신나게 비질하는 주인의 모습도 담게 되었다. 춤을 추는 듯한 그의 두 팔과 숙인 몸짓은 바람 불어 추위로 움츠려 있던 낯선 방문객의 마음을 포근하게 웃도록 해 준다. 무어라도 골라 구입하려는 내게 괜찮다며 구경만 하고 가도 된다고 손을 흔든다. 호주 멜버른은 멋진 곳이니 즐겁게 여행하다 돌아가라고 인사를 덧붙인다.
열한 시에 티룸 앞에서 만나자 약속했던 남편이 기억나 작은 도로를 건너 서둘러 걸었다. 담쟁이와 꽃이 예뻐 잠시 사진을 찍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이거 선물이에요. 호주의 마누카 꿀과 염소젖이 들어간 비누인데 피부에 아주 좋답니다. 사사프라스 마을에 또 놀러 오세요.”
기름종이에 서둘러 돌돌 말아 온 듯한 직사각형 모양 비누를 손에 쥐여준다. 그리고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뒤돌아 성큼성큼 차도를 건넌다. 종이를 펼치니 아기 살처럼 색깔도 촉감도 보드랍다. 가게에서부터 한참 뛰어왔을 구두 신은 걸음이 아른거린다. 호주 시골마을에서 따뜻한 사람의 마음을 얻어간다. 한국에서 익숙했던 그 '정'과 똑같아서 찬바람 부는 아침에 가슴이 시큰해진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손에 들린 선물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한 손에 선물을 조심히 감싸고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한 '미스 마플스' 티룸 앞에 섰다. 동화책 엘리스에 나올듯한 주인공이 그려진 하늘색 간판의 통나무집이다. 문을 열고 장미 문양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에 미끌리듯 앉았다. 검은 원피스에 프릴 달린 앞치마를 두른 여직원이 주문한 뜨거운 차와 빨간 라즈베리 시럽이 흐르는 와플을 식탁에 차려준다. 이제 막 사사프라스 동화책 여행 절반을 마친 듯 기분이 묘해진다. 손에 쥔 하얀 기름종이 속 딱딱한 비누는 동화를 여행할 수 있는 황금 열쇠인 것 마냥.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기억하게 되는 사사프라스 마을은, 내게 부드러운 향의 비누와 달콤한 라즈베리 잼이다.
작은 비누 하나에 여러 장면의 추억과 감정까지 쓸어 담아서 왔다. 손을 한 번 씻을 때마다 호주의 예쁨과 친절함이 기분 좋은 웃음 끝자락에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