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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고수를 만났다.

제주 올레길을 도장깨기 하는 그녀

by Jina가다

그녀는 오늘 입은 등산복을 손빨래해서 빨래 건조대에 널어두었다. 그리고 올레길을 코스 따라 걸으며 도장깨기 하듯이 26코스 완주했단다. 제주시 올레길 명예의 전당에 사진을 올린 후 멋진 곳들은 다시 걷는 중이란다. 좋은 호텔로 다니지 않고 5일 여행 일정을 계획하고 와서 걷기 코스 근처 숙소를 예약해서 누린다. 등산복 2벌과 모자 그리고 큼지막한 배낭 하나로 여행을 이어가는 그녀가 멋졌다. 나의 여행 일정 수정에도 조언해주며 깨끗하고 안전한 공항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소개해 주었다. 덕분에 이른 아침 출발하는 비행기 때문에 고민하던 나는 머리 복잡하던 수고를 멈출 수 있었다.

2박 3일간 천천히 다가온 그녀는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지만 함께 한 방을 사용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숙박을 함께 한지 3일째가 되는 아침, 간단한 샌드위치 조식을 나란히 앉아 마친 후 서둘러서 새 여행지로 떠나는 그녀가 아쉬웠다. 사진이라도 한 장 함께 찍을 걸 그랬나, 전화번호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잠시 미련이 남았다.

게스트하우스를 처음 이용해 보는 나는 출발 전 인터넷에 소개된 평점 높은 곳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안전과 주인장의 배려, 위치와 건물구조 그리고 사진 등 댓글까지 꼼꼼히 찾아보고서 하루를 예약했다. 이미 함덕 해수욕장의 바닷가 호텔에서 편히 쉰 터라 좋은 숙소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혼자 여행길에 여비를 아껴보고 새로운 도전을 해볼까 해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시도한 것이었다.

젊은이들만 사용할 것 같다는 선입견은 잘못된 것이었다. 성산일출봉 바로 앞에 위치해서 바다와 산의 뷰를 모두 소유한 게스트 하우스에는 6인실 도미토리에 중년 여성 세 명이 함께 했다. 버스를 타고 성산에 도착한 저녁시간에 인터넷 지도를 따라서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3층 공용 휴게실에 도착 후 주인에게 도착 문자를 넣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에 석양이 드리워져 예뻤다. 멀리 보이는 광치기 해변은 붉은 노을과 함께 어두워지고 있었다.

방을 배정받고 가보니 누워서 쉬는 이가 있어 침대 곁에 짐만 두고서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휴게소에서 책을 읽고 차 한 잔에 글을 쓰고서 한참을 머무른 후 306호 방문을 다시 열었다. 나중에 도착한 또 한 사람은 눈을 맞추며 뭔가 말을 건네려 했다. 마스크를 착용한 나는 쑥스러움에 고개 인사만 하고 간단히 씻고서 취침 준비를 했다. 밤 9시인데 이미 마스크팩을 올리고서 잠든 이가 있어 숨죽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각자의 침대에서 핸드폰 불빛만 잠시 보일 뿐 약간은 불편한 게하의 첫날 숙박이 되었다.

성산 일출봉 등산을 마치고 오니 주인아주머니와 어제 늦게 입소한 이가 아침을 준비 중이었다. 먼저 잠들었던 중년 여성은 서둘러 버스를 타고 여행지를 이동했단다. 주인장의 정성 가득한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서 블랙커피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입담이 좋은 주인아주머니와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우리 셋은 주인장의 부엌에 초대받아 브런치를 나누는 아줌마들의 모습이었다. 아침해가 뜬 제주바다를 옆에 두고 수다 삼매경...

한 시간 가량 우리의 대화는 다양한 주제를 오갔다. 솜씨가 좋으니 게스트하우스에서 쿠킹 수업이라도 해 보라는 그녀의 제안을 시작으로 주인아주머니는 요리 선생인 여동생을 9년간 데리고 산 이야기, 6남매의 생존 이야기, 전라도에서 제주까지 흘러온 이야기 등 끊이지 않는 말솜씨로 혼을 쏙 빼놓았다. 대화를 멈출 수 없는 분위기에 그녀와 나는 눈빛만 주고받을 뿐 한 시간 동안 식탁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오늘의 일정을 묻는 나의 질문에 그녀와 나는 정보를 주고받으며 주인아주머니에게 아침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이미 성산 일출봉 등산으로 한풀 지친 상황인데도 그녀와 주인장은 우도 관광을 적극 권해 주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가 언제까지 이어질 줄 모르니 오늘은 꼭 우도를 들어 가 보라 했다. 남의 제안에 그대로 덥석 따르는 나는 아니지만 경험 많은 그들의 말을 수긍하며 우도로 떠날 준비를 했다. 물론 그날 저녁에는 우도를 종일 관광한 나와 올레길 25, 26코스를 걷고 온 그녀가 각각의 침대 맡에 앉아 끊임없이 제주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현재 스물여덟이 된 딸과 어릴 적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여행담과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나도 여행이라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묻지 않는 이상 그녀에게서 술술 터져 나오는 여행담에 감탄을 연발하며 그저 좋은 정보들을 수집했다. 올레길을 정복하는 요령들, 멋진 오름들 소개, 저렴한 비행기표 구하기, 게스트 하우스와 저렴한 펜션을 이용하는 방법들도 배웠다.


나는 올레길 도장깨기는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웃으며 얘기했지만 또 모른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두 명의 그녀들처럼 나도 올레길을 걸으며 도장을 찍고 다닐지도...


가벼운 짐과 가벼운 비용으로 여행 다니는 그녀는 진짜 여행의 고수였다. 캐리어를 끌며 좋은 숙소를 고민했던 나는 여행의 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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