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누구의 아버지들-10회

난 내 아버지를 싫어했다. 고로  내편인 바깥 남편도 싫었다.

난 내 아버지를 싫어했다.  그래서 내 남편도 한 땐 싫었다. 내편이 아니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난 혼자서 잘 살 수 있을까? 엄마 놀이도 안 하고 아내 역할도 안 하고 혼자서 잼 나게 잘 살아 가고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답은 잘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남편이고 보호자가 필요하겠지만 두 가지 역할을 할 남자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을까? 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착실한 순수한 아이였든가 생각을 해 본다.  그렇지 않다. 아버지의 인생이 엄마라는 한 여자를 만나 꼬이기 시작한 것이 그냥 불쌍하게 느껴져서 좋아하는 척 연극을 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럿사람의 배역을 맡은 배우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착한 역을 맡을 때는 한 없이 착한 척, 순진한 척 , 이 세상의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는 역할로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독한 역할을 맡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잔뜩 독기가 가득하여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악독한 역할을 잘 도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상황이 다르고 맡은 배역의 역할도 다 다르다. 한 두가지로 끝낼 수 있는 사람, 까도 까도 끝없이 비밀에 둘러 쌓인 막장드라마의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배역의 주인공도 있다.  


난 한번씩 넌 참 연기도 잘 한다. 넌 악한 역도 잘하고 순진한 역도 잘하고 멍청한 역은 제일 잘하나. 누가 뭐래도 A급이다. 누가 나를 따라 오랴.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시커먼 남자들 틈에서 자라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적 인간으로 자랐다. 여자들처럼 조잘 조잘 거리지도 않고 크게 사람들에 대한 궁금점도 많지 않다. 잘 삐치지도 않는다. 여성성이 부족하고 남자들처럼 배포도 크지 않고 오히려 쫄보이다. 겁은 얼마나 많은지 작은 동물, 강아지 만 봐도 오금이 저린다.


얼마전 신경숙 소설을 보면서 그 주인공의 아버지, 누구의 아버지가 나온다. 그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잘 운다. 혼자서 거역 거역 운다. 불쌍하게 운다.  내 아버지도 혼자서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우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누운 자그마한 등을 보면 혼자서 울음을 삼키는 것 같다. 마음 놓고 울수 조차 못하지만 울음을 꾹 참는 좁은 어깨를 가진 남자. 피부가 하얗고 아버지에게서만 나는 아버지 냄새를 가진 남자.  남한 남자와 북한 여자가 만난 남남 북녀의 외롭고 힘겨운 삶을 지탱한 남자 무능력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그래도 가족을 지키려고 애를 쓴 남자 그 이름,  '내 아버지 ' 그 아버지의 딸인 나는 정말 사랑했을까? 그리고 그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있을까?  그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 그 아버지가 정말 싫어하는 것, 그 아버지가 힘들어 하는 것,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고기보다 야채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는 것,  그 외에는 잘 모르겠다.  참 신기한건 한 가지 있다. 여자들이 하는 말 중에 "난 아버지가 싫어! 난 아버지 같은 남자와 결혼은 안해, 아버지 같은 남자와 결혼 할 바에 난 혼자 살거야!" 그렇게 말 하는 여자 중 거의 다 지가 제일 싫어하는 아버지와 똑 같은 붕어빵을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버지에게 익숙해져 있다. 그 환경 속에 오랜시간을 보내고 부대끼며 살았다.  인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가 말 같이 쉽지가 않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고 헤어지며 수도 없는 반복 가운데서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환경의 동물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족의 두 얼굴인 것이다.  분명 내 앞에 백마를 탄 왕자님은 있다. 백마는 너무나 눈부시다. 고급스럽다. 바로 부담이라는 또 다른 생리적 멀미를 가져 온다. 그냥 메스꺼워 속이 불편하다. 밥 한끼 먹는데도 체증이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금수저에 잘난 남자는 늘 모자라는 여자에게 구애를 하고 모자라는 여자는 자기와 똑같은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동병상련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기며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통 인간이다.


나 역시 남자 보는 눈은 똑같다. 나에게도 백마가 아니라 물에 손도 안 담그고 해외 여행을 밥 먹듯이 해 주겠다는 부자집 남자도 있었다.  만나면 힘들었다. 난 아버지 보다 월등한 남자를 만났고 아버지는 술 고래 이지만 이 남자는 맥주도 제대로 마시지 않는 점잖은 남자 일단 대 성공이라고 생각을 했다. 사이즈만 다르고 다 똑같다.  난 이미 아버지에게 익숙하다. 젊은 아버지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결혼 앞에서도 쉬운 결정을 내릴수가 있다. 힘들지만 참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이다. 난 아버지도 남편도 진심어리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젊은 아버지와 살면서 원래 내 아버지에 대한 이해도 되고 미안한 감정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내 아버지에게 다 못해 드린 거 젊은 아버지 내 남편에게 사랑을 받기 보다는 주려는 마음이 생긴다.  이 남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가져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이걸 연민이라고 애듯함이라고 불러야 하나, 불쌍함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다. 그냥 누구의 아버지들이다. 못난 남자, 잘난 남자 모두 누구의 아버지들이다.  이런 60이 넘은 아버지들, 남자들이 이유도 없는 이혼, 졸혼 앞에 내 몰리고 있다.

정말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성경에는 이 여자에게 돌 던질 수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은 나와라 처럼

우리가 이 남자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죄 없는 사람들, 여자들은 얼마나 될까?  


내 아버지에게도 착한 척 한 딸이었고 남편에게는 순한 척 이해하는 척 한 아내 였고 아이들에게 현명한 척하는 엄마 였는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노래가사처럼 있을 때 잘해야 겠다.  <누구의 아버지들 연재 마침> 

작가의 이전글 누구의 아버지들-9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