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숙한 순간

언어의 무게 - 파스칼 메르시어

by 스티카 Stica

“너랑 하는 대화는 재미가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언니가 말했다. 불과 삼십분 전 본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나 수다스러웠던 사람이, 텅 비어 조용한 버스 안에서 어떻게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말이었다. 나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화제를 꺼내기가 일쑤라, 내 말은 별로 듣고 싶지도 않고 그다지 대꾸할 말도 없다는 것이었다. 서운했지만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의아한 일은, 청소년기의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많은 것(만화 <호텔 아프리카>, <오디션> 이라거나 소설 <키친>과 <N.P>등)을 그녀와 함께 좋아했는데, 어째서 대화의 소재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언니는 이후 내가 대학생이 되어 갖게 된 옷과 음악 취향에 대해서도 또박또박 ‘비주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보다도 훨씬 전에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급식소에서 함께 밥을 먹던 꽤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한자 단어를 썼는데, 친구가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물었고, 내가 설명하자 정색하며 왜 그런 어려운 말을 쓰냐고 했다. 그 단어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상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단어는 ‘개연성’ 뿐인데, 그 단어가 초6에게 그렇게까지 비일상적인 것은 아닌 듯 하여 정확한 단어는 잊어버린게 아닐까 한다. 만약 그 단어가 정말 ‘개연성‘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내가 그녀를 비롯한 신화 팬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T.O.P를 포함한 신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친구들끼리 만들어낸 우스꽝스런 율동을 함께 춰 준 노력이 정말 아깝지 않은가. 그녀는 앤디를 좋아했고 다른 한 친구는 김동완을, 또 다른 친구는 신혜성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심리상담을 할 때에도 상담사로부터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받았다. 내가 대화를 할 때 가끔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리만치 의도적으로 단어 하나 하나를 선택하여 말을 한다며, 그게 혹시 상대방으로부터 지적 수준을 인정받고 싶어 그런 것이냐고. 난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인정에 대한 욕구라기보다는 표현에 대한 욕구다. 내 정신에 떠오른 것을 정확하게 붙잡아 상대에게 내보이고, 그것이 상대의 정신에 맺히는 상을 가까이 보고, 다시 그 상을 내게 투영해보고 싶은 깊숙한 소통에 대한 욕구. 누군가 나를 머리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주면 당연히 싫지야 않겠지만 그런 건 외로움의 공백을 조금도 채워주지 못한다.


그래도 그때서야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었구나. 불편함에서 편안함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나 그 반대의 전환을 겪을 때, 굳이 그것이 온도의 변화였는지 촉감이었는지 공기였는지를 분간하고, 핀셋으로 집어내 발화할 때의 짜릿함. 누군가 그 세밀한 편린을 알아보고, 그것과 화학구조가 다른, 그래서 상호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다른 편린을 내밀어줄 때의 기분은 또 어떻고! 하지만 그렇게 현미경이 필요할 만큼 몹시 작은 조각들을 모두가 궁금해하지는 않는 것이다. 솔의 눈 음료수나 박하맛 초콜릿을 모두가 좋아하지 않듯. 그러니 다들 나와의 대화를 피로해 했구나. 그런 피로는 이를테면 내가 집중이 필요한 게임들(카드게임이나 화투에서부터 체스나 바둑까지 규칙이 있는 모든 게임)의 룰을 익히기 귀찮아하고, 친목을 위해 어떤 게임에 참여해야 할 때면 슬그머니 도망치는 이유와도 비슷한 것일테다.


그런 면에서 책 <언어의 무게>의 구성과 내용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책에서는 시종일관 밀도 높은 사색과 대화가 쏟아지는데, 읽는 내내 ’이거 봐, 나 말고도 이런 생각을 말과 글로 내뱉고 서로 나누는 사람들(소설속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적어도 작가만큼은)이 있다고!‘하는 해방감을 느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학적이라고 질려할 법한 이야기들을 신이 나서 떠드는 등장인물들을 따라가다보면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 없다. 언어가 쏟아지는 폭포 속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기분이다. 소외와 고독이 씻겨나간다. 주인공이 죽은 아내에게 쓰는 편지에서 “관”의 영어 coffin과 독일어 sarg의 음색을 비교하며, coffin은 무해하고 싹싹하게 들리는데 반해 sarg은 더 어둡고 딱딱하고 최종적으로 들린다고 말할 때는, 아니라고, coffin도 무거운 뚜껑이 닫히는 숨막히는 순간, 그리고 그로 인해 공기와 빛이 영원히 차단되는 울림이 있다고 반박해보고 싶기도 했다.


또, 주인공은 글쓰기와 그 중에서도 타인을 향한 글쓰기가 일으키는 내면의 작용에 대해서도 콧구멍이 뻥 뚫리도록 명료한 문장으로 이야기해주었다.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그저 묘사만 하는 생각이라고 해도 타인의 정신을 위해 내 생각과 감정을 열어 보이고 그에게 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된다는 것. 이는 메아리가 울리지 않는 브런치라는 글쓰기 계곡에서 내가 계속 글을 써야할 이유가 되어 줄 것 같다.


이제(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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