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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Sep 21. 2023

70일차, 시간에 대한 감각

어느덧 사랑니 발치가 공포스럽다

하루를 걸러 요가를 갔더니 원장님이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머쓱하게 '커피를 잘못 마셔서요'라고 하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코피?'라고 되물으셨다. 날마다 새벽 문을 열기가 무섭게 기다리고 서 있던 집착녀가 안 오는 일이라면 심하게 아프거나 사고라도 났던 게 아닐까 하고, 나라도 조금은 걱정이 되었을 것 같긴 하다.


비 오는 새벽의 요가를 마치고 경의선 숲길을 걸어왔다. 날이 꽤 차다. 어느덧 9월을 훌쩍 넘겨 9월 20일. 9월도 이렇게 지나가 버리는구나. 9월은 어째서인지 다른 달보다도 더욱 보내기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눈에 띄는 성장을 모두 마치고 가파른 쇠락이 시작되기 전이다. 비바람에도 하늘과 땅의 초록빛은 끄떡이 없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빗방울들이야, 하듯이. 하지만 곧 생기를 잃어버리고 주름 많은 회색빛 나뭇가지들만 남겠지. 특별히 치열하지 않았던, 그러나 꽉 들어차 건강했던 9월은 그냥 놓아주기 서운하다.


오전에 사랑니 발치를 위해 다시 외출했을 때는 바람이 좀 더 거세져 있다. 한 정거장 거리이지만 조금이나마 쾌적하게 지하철을 타고 가야겠다. 지난번 치과에서 위쪽 사랑니 두개 다 충치가 있다고, 발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를 듣고 예약을 해둔 것이다. 하필 비가 종일 내리다니, 반대쪽 때문에 한번 더 와야 하는데. 아래쪽은 십대 때 한꺼번에 발치를 한 적이 있어서 위쪽도 두개를 한번에 뽑고 싶다고 했었다. 두 번 치과 갈 일을 한번으로 줄이고 싶었던 것인데, 예약을 도와주는 직원이 염증 발생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며 안 된다고 했다.


발치 전문이라던 외과 의사 분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성이었다. 외형에서부터 힘이 좋을 것 같은 다부진 체격의 남성이겠거니 하고 상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발치업무 자체에 대해 워낙 무지한 탓도 있지만, 체격이나 성별을 특정 직무와 연결지어 생각했다는 데서 '너는 그러면 안 되지'라고 반성했다. (주재원으로 막 부임했을 때, 현지 상사가 '남자일 줄 알았다'는 말을 일주일 내내 얼굴을 볼 때마다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의사는 마취주사를 놓을 때마다 아플테니 놀라지 말라고 했다. 좀 더 목구멍 가까운 쪽을 찌를 때에는 '아주 많이' 아플 것이라고 경고해주었다. 통증은 잘 참았는데,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후 가까운 부분의 감각이 없어져서일까. 숨은 코로 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으니 공포가 일었다. 간호조무사가 발치 과정을 설명해주면서 침을 뱉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원래 이렇게 숨이 잘 안쉬어지는 건가요'와 같은 멍청한 질문을 함으로써 '원래 그럴 수도 있다'는 대답으로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고 참기로 했다. 가만히 코로 숨을 다시 쉬어보니 숨 쉬는데 지장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입속 일부가 마비된 감각에 적응이 되어갈 무렵, 의사가 다시 돌아와 앉았다. 오늘 뽑을 왼쪽은 뿌리가 바로 나 있어 가능성이 매우 낮긴 하지만, 30대에는 뼈가 단단해져 있으므로, 간혹 뿌리가 끊어진 채로 뽑히는 경우가 있다, 혹시라도 그럴 경우 파내려고는 하겠지만 코쪽으로 너무 가까운 부위라면 그냥 두고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특별한 이상은 없기 때문이며 만일 그런 결정을 하게 될 경우 알려주겠다, 는 이야기를 두 번 했다. 이렇게 무서운 일이었던가. 사랑니 두 개를 한번에 뽑겠다고 무식한 고집을 부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마취가 되어도 감각은 있을 것이다, 고 경고하며 오른쪽으로 기대어 벌린 입 속에 도구를 집어넣었다. 손놀림이 빠르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다. 우지끈, 하는 찰나, 제발 이 한번의 움직임으로 뿌리채 뽑혔기를 기도했다. 의사는 차분하게 사랑니 옆에 있던 치아에 충치가 있음을 설명하고, 약간의 처리를 해준 뒤, 충치 위치상 본격적인 치료는 할 수 없다, 만약 더 진행이 된다면 그때 신경치료를 하면 된다고 했다. 충치 부위를 사진으로 촬영하기 위해 간호조무사에게 일련의 지령을 내렸다. '포그만 없애달라'는 이야기를 세 번정도 한 것 같다.


발치 부위에 거즈를 단단히 물려주면서, 1~2시간 정해준 시간 동안 계속 잘 물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침이 입 안에 잔뜩 고여 타구에 뱉었는데,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의사가 경악하며 방금 침을 뱉은 거냐고 확인하고서, 침 뱉지 말라고 했잖냐며 짜증을 냈다. 거즈를 계속 물고 있어야 한다고요. 거즈는 잘 물고 있는데요... 라고 했더니 침도 뱉지 말라, 해서 아, 그럼 삼켜야 하나요, 라고 다시 물었더니 삼켜야 한다며, 간호조무사에게 날 선 목소리로 아까 이야기했던 주의사항 제대로 이야기해주라고 지령을 내리고 가 버렸다.


그러고보니 아까 간호조무사가 침을 뱉으면 안 된다고 했던 것 같긴 하다. '거즈를 잘 물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까먹은 것 같다.


턱이 아플 정도로 거즈를 꽉 깨문채 (그렇게 꽉 깨물어야한다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힘을 빼면 거즈가 빠질까 두려웠다) 집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공손할 수 없다.


1) 사람들은(나는) 주의사항이 많으면 한 두가지를 놓쳐버린다. 2) 사람들은(나는) 불안하면 이상한 질문을 해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어한다. 3) 이전의 나는(사람들은) 신신당부한 사항들을 부주의하게 놓치는 사람들을 보면 짜증을 냈(낸)다. 4) 그 짜증은 부주의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을 그르칠까 염려하는 노파심이 드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주일 후에는 뿌리가 약간 비뚤어진 오른쪽 사랑니를 뽑기로 했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결단력 있는 그녀 말을 잘 들으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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