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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Nov 22. 2023

헤는 밤

외롭지 않아서 혼자 여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 한시가 되기 오분 전. 전날 네시에 일어났으니 꼬박 스물한시간을 깨어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럴때 문인들은 별을 헤는 것인가. 내 숙소 베란다에서는 체육관과 고목 한 그루가 하늘을 가린다. 덕분에 커튼과 베란다 문을 여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정신이 지나치게 밝아 눈을 뜰 수 없는 섬광에 노출된 기분. 글이라도 쓰자며 아이패드를 집어드니, 생각들이 널브러져 빨래더미가 된다. 시간이야 많지 않나. 느릿느릿 개켜보았다.




전날 저녁, 남편이 갔다. 볼트(Bolt) 택시만 불러주고 공항에는 배웅을 가지 않았다. 공항에서 다시 돌아오는 택시 비용과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 우리 부부의 공식적인 이유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남편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마음보다도, 혼자 돌아올 때 느낄 감정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이 공항으로 떠난 뒤 나는 수영을 할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홀로 되고 나니 차가운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요 며칠 날씨가 부쩍 시원해지면서 콘도의 수영장 물이 많이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대신에 따뜻한 물로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 이삼일쯤 넣어뒀던 작은 수박 반통을 꺼냈다. 그랩(Grab)으로 슈퍼에서 배달시킨 것인데, 아무리 사이즈가 작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가격이 32밧(1200원 수준)밖에 안 된다. 통째 숟가락으로 퍼먹으니 배가 과하게 불렀지만 몹시 만족스러웠다. 올 여름 수박을 (비싼데다 자르고 보관하는 공정이 번거로워) 양껏 못 사먹은 데 대한 보복성 섭취라는게 내 핑계다.


수박을 네 숟갈쯤 퍼먹었을 때, 문 밖에서 고양이가 대차게 울어제끼는 소리가 들렸다. 잠옷 위에 겉옷을 걸치고 문을 열어보니, 콘도 맞은편의 세탁방과 콘도를 오가며 생활하는 젖소(흰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들어간) 고양이가 계단을 타고 우리 층까지 올라와 있었다. 고양이들이 콘도 바깥 출입문이 열릴 때 수영장이 있는 중정으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경비, 사무실 직원이나 청소하는 직원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전에도 젖소가 레지던스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한번은 다른 주민이, 한번은 남편이 다시 밖으로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다.


콘도 이웃 젖소(흰색 바탕에 검은 무늬) 고양이

문이 빼꼼히 열린 내 방으로 들어오려는 녀석을 손으로 살짝 밀쳐냈다. 짧게나마, 고양이 화장실을 사서 방에다 두고 같이 지내면 어떨까 하는 이기적인 상상을 했다. 안 되겠지. 빌려사는 집에서 집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고양이를 들일 수는 없다. 게다가 내가 한국으로 데려가서 끝까지 책임질 게 아니라면, 젖소도 실내생활에 익숙해지지 않는게 나을 것이다. 나는 제주도 에어비앤비 숙소 테라스에서 만난 길고양이를 서울 집으로 들여온 전적이 있다(그렇게 애월읍 수산리에서 첫째 고양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이 '물메'다. 당시에도 나무를 타고 숙소 테라스에 올라온 물메를 실내로 들이지 못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베란다 문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종국에는 또 비슷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일었다.


젖소는 내가 쓰다듬기만 하고 집 안으로 들이지 않자 앞집 문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앞집에서 문 앞에 둔 신발 냄새를 맡는 폼이 곧 신발을 물어뜯을 기세다. 모른척하고 집에 혼자 들어가려고 했는데, 시끄럽게 우는 것 뿐만 아니라 신발까지 물어뜯는 고양이를 사람들이 싫어하게 될까봐 걱정된다. 하는 수 없이 녀석을 들쳐안고 내려가 건물 밖에 놓아주었다. 문을 닫기 전, 미안해, 라는 의미로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이자, “우앵!”(만지지 마!) 하고 돌아보며 신경질을 낸다.


무엇이 옳은 일이었을까, 싶지만 남편도 녀석을 문 밖으로 보냈던걸 보면 그게 온당한 처사였을 것이다, 고 생각해버렸다. 나보다 정이 많으면서도 사회의 기준에 더 잘 맞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내게 집중하는 시간이다. 새벽 네시 일어나기와 요가를 제대로 한번 해 보자. 남편과 있을 때는 최대한 남편과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요가원에 등록하지 않았었다. 쓰다 만 소설도 치앙마이에서 완성하면 좋겠다….고 전날 밤 잠들기 전의 내가(돌이켜보니 사뭇 낯선 내가) 야심차게 생각했다.




계획대로 새벽 네시에 일어났다. 홍차를 진하게 잔뜩 우려 마시면서 연재 글을 다듬어 발행했다. 8시가 조금 지나, 요가복을 입고 킨들과 고프로를 챙겨 요가원에서 가까운 카페 FOHHIDE에 갔다.

FOHHIDE

5층에 위치하고 있는데 과연 듣던대로 경치가 아주 좋다. 피콜로 라테(Piccolo Latte)의 우유를 오트밀크로 변경하니 가격은 95밧. Ristr8to나 Roast8ry보다 더 진하고 고소하다. 일년째 다 못 읽은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는데, 이제야 이 소설이 왜 인기가 많았는지 알 것 같다. 장면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있고 문장의 리듬도 탁월하다.


10시반쯤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옆 건물의 요가원 Om Ganesha Yoga에 갔다. 10회권 가격 2000밧을 GLN 스캔으로 결제하고, 11시 수업에 참여했다. 월요일 11시는 Gentle Flow Yoga. 초급에서 고급까지 두루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이라더니, 역시 특별히 어려운 동작은 없어서, 끝나고 나니 가슴팍에만 슬몃 땀이 배었다. 길을 건너 노점에서 카오소이를 한 그릇 사먹었다. 세번째 방문이다.


닭봉이 두 개 들어간 카오소이 스몰사이즈가 50밧. 얼음물을 가져다 먹을 수 있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귀찮아서 안 가져다 먹은 것인데 주인할머니가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친절하게 물을 떠다 주셨다.

카오소이 스몰사이즈 (50밧) @Noodles and Khao Soi Shop (구글맵상 이름)


편의점에서 제로콜라를 사 마시고 원님만(One Nimman)에 위치한 네일샵 레인보우 네일즈 (Rainbow Nails)에서 매니큐어와 페디큐어를 받았다. 지나갈 때마다 현지인 손님들이 많아보여 점찍어뒀던 곳이다. 매니/페디 젤 컬러가 각 400밧으로, 총 800밧을 냈다. 선명한 색 (vivid color)은 없느냐고 물으니 모두들 "vivid"라는 단어는 생소한지 얼굴을 찡그려서 "선명한 색 태국어 번역"을 검색해서 나오는 태국 글자를 보여주었다. 화면을 보고는 "씯쏟"이라고 읽는 걸 보니 "선명한 색"은 "씯쏟"인가보다. 짧고 뭉툭한 손발톱에 밝은 파랑을 칠해두니 (내 눈에는) 퍽 귀엽다.


Extra Green Tea Vega @ChaTraMue

그러고서도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원님만의 차트라뮤(ChaTraMue)에서 'Extra Green Tea Vegan'을 당도 0%로 해서 마셨다. 65밧. 진하기는 하지만 오트밀크도 미세한 단맛이 있으며, 기본으로 들어가는 '에메랄드 펄' (초록색 곤약젤리)가 달기 때문에 내 입맛에는 당도 0%가 딱 알맞다. 앉아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그제서야 집(숙소)에 돌아와 몸만 씻은 뒤 15분 정도 수영을 했다. 발이 저릴만큼 시려 오래는 할 수 없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길게 한 뒤 냉장고에서 코코넛을 꺼내 먹었다. 치앙마이에서는(짐작건대 태국 다른 지역에서도) 코코넛 껍질을 벗겨 하얀 과육과 그 안에 담긴 코코넛워터를 둥그런 플라스틱 용기에 넣어 파는데, 마야몰 지하슈퍼 Rimping에서는 79밧, 원님만 푸드코트에서는 60밧, 씽크파크 (Think Park) 노점에서는 65밧에 팔고 있다.


몇 시간을 내리 유튜브만 봤다. 남편과 함께 지내는 동안 보지 않았던 것들을 몰아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남아있던 달걀 다섯개를 모두 삶았다. 세개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두개를 소금과 후추에 찍어먹었다. 망고까지 두개 먹고 나니 배가 몹시 불렀다. 남편이 가면 더 이상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남은 맥주 LEO 한 캔을 자연스레 꺼내 마셨다. 다 마시고 아홉시쯤 침대에 누웠을까. 피곤이 풀리지 않은 채로 눈을 떴을때는 10시 반이었다.


그러고서 다시는 잠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홍차, 피콜로 라테, 제로 콜라, 차트라뮤 밀크티까지. 하루종일 카페인 섭취가 과했던 탓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인데, 자기연민에 빠져서는 남편이 없어 허전하니 잠이 안 오는구나 싶다. 이윽고 내 안의 내가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럴거면 왜 굳이 (에어비앤비보다는 훨씬) 넓은 집을, 사랑하는 남편과 고양이들을 버려두고 떠났니? 그러게나 말이다. 여행 블로그를 보면 혼자서도 매일같이 재즈펍을 가고, 맛집 투어도 하고, 세계각국의 친구들도 잘만 사귀던데. 나는 카페에서도 오도카니 혼자 앉아 에어팟을 끼고 책이나 읽는다. 일행과 함께 온 사람들, 여행지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끼리 재잘대는 한가운데, 홀로 겸연쩍은 기분을 감추면서.


나는 혼자서도 잘 하는, 내면이 견실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눈치가 없는 주제에 눈치를 많이 보는 찐따 유형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분수를 모르고 혼자서 여행을 떠나온 이유가 뭐였을까. 타당한 이유가 있었어야 하지 않은가. 


혼자라도 떠날 수 있을 때 떠나야만 했다.


동떨어진 존재로서 느끼는 고독과 회의는 꽤나 무겁다. 하지만 결국 무게의 추가 기우는 쪽은, 내가 소속되지 않은 곳에서야 비로소 나를 찾아오는 생각과 감정, 수반되는 깨달음의 기쁨, 그리고 일과가 아닌 일상을 보내며 조용히 차오르는 충만감 쪽이다. 그렇게 나지막이 스스로에게 이야기해보았다. 외로움을 느끼더라도, 잘 한 일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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