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대성당 (Sé do Porto)
내 어머니의 어머니는 매일 새벽 네다섯시부터 여섯시 미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묵주기도를 하는 분이었다. 묵주기도를 하고서는 성당에 가서 아침미사를 드리고 오셨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 가는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할머니는 하느님 생각만 하면 신이 나는지, 소풍가는 어린이 얼굴을 하고 성당에 가셨다. 그녀의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엄마의 신앙심은 할머니의 신앙심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엄마는 나와 언니가 어릴 때는 매우 열성적으로 성당활동을 하고 묵주기도를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주일미사조차 가지 않는 냉담자가 되었다.
엄마의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는, 엄마보다도 더 비뚤어져, 어려서부터 왜 여자는 수녀님만 할 수 있고 신부님은 할 수 없는지가 납득되지 않았다. 하늘에 성령이 비둘기로 나타났다거나, 불꽃 모양의 혀가 내려왔다는 성서 대목에서는, 정말로 자리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장면을 보았던 것일까, 혹시나 다른 신자가(들이) 본 것을 나도 보았다며, 신앙심을 증명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사람은 없었을까, 불온한 의혹을 감추어야 했다. 토요일 청소년 미사의 봉헌금 천원은 군것질거리를 사먹을 수 있는 쌈짓돈이 되어주었다. 그러다 어느날 미사시간에 성당 옆 학교 운동장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근처 시장에 장을 보러 온(그러다 귀신처럼 운동장에 내가 있는 것을 알아챈) 부모님에게 발각된 일이 있었다. 거꾸로 엄마와 아빠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다리가 스륵 풀려버렸다. 정수리가 바닥에 꿍, 수직으로 부딪쳤다. 엄마 아빠는 매우 엄격한 부모였지만, 머리를 찧은 즉시 큰 울음을 터뜨린 딸을 차마 야단칠 수는 없으셨던 것 같다. 그 후로 일이주간 머리에 혹을 달고 다녀야 했지만, 내심 철봉을 하고 있어 머리를 찧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가 자발적으로 다시 성당을 찾았던 것은 중국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였다. 매순간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띄어쓰기도 없이 빼곡한 교과서의 중국어 글자들이 뇌내산소를 남김없이 빨아들이던 때. 전체 인생을 통틀어 그때가 스스로를 가장 미워하던 때였다. 매시매분매초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매시매분매초 하기는 싫었다. 성장이 멈춘 이후로는 몸무게가 제일 적게 나갔는데도, 빵 한조각, 밥 한숟갈을 맘 편히 먹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인미사에 가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북경의 오래된 성당에서 열리는 한인미사였다. 성당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양 어깨부터 목덜미, 정수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엠보싱을 느꼈다. 여느 성당처럼 층고가 높고, 상부창이 깔때기처럼 눈부신 빛을 쏟아붓는 곳이었다. 영성체를 모시고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주위의 사람들을 당황시킬까봐 눈물을 닦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모른체 했다.
서러워서, 슬퍼서 운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나를 누군가 사랑해주고 있다는 느낌에 고마워서 울음이 터진 것이었다. 이런 나여도 정말 사랑해요? 라고 여러번 물으며 울었다.
성당을 안 간지는 어언 십년이 다 되어간다. 의식만 안치를뿐 신앙심은 깊답니다, 라고는 말할 수 없고, 심지어 내가 카톨릭의 교리를 믿는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나까지 사랑하는 신이라는 것은 (믿고 싶기 때문에) 믿지만, 그렇다면 왜 모범적인 신자 욥은 그렇게까지 철저히 괴롭혔는가 이해할 수 없고, 그 신이 나의 신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나치게 편의적인 가짜 신자다.
포르투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전 어느 토요일, 늦은 오후였다. 렐루 서점에 가 보려는데, 공사 현장을 에둘러 가야 해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 분명 구글맵이 알려준대로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다른 방향으로 걷기도 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크리스마스 성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행사라도 하는걸까.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만큼, 멀지 않은 곳일 것 같은데. 그때 “글로---------------리아, 인 엑스 첼 시스 데-오-”하는 후렴구가 들려왔다. 아잇참.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성가란 말이다. 특히 '인 엑스 첼 시스 데-오-' 부분. 발을 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성당이 아니었다. Aliados 역 앞 광장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무대 아래로는 의자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게다가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노래가 끝나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보안요원처럼 서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 다음 공연은 언제인가요, 물었다. 그러자 그가, 방금 그건 리허설이었단다, 공연은 6시에 시작해, 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본 공연은 포르투의 음악학교 Banda Marcial da Foz do Douro 학생들이 관현악기를 연주하고, 포르투 대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노래하는 공연이었다. 클래식 여러 곡으로 시작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내가 좋아하는 '인엑스첼시스데오 성가' (<글로리아 높으신 이의 탄생>), 그리고 포르투갈인이라면 모두 다 아는 듯, 떼창을 불러일으킨 어떤 포르투갈 노래로 끝이 났다.
'인엑스첼시스데오 성가'만 들으면 될 것 같았는데,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다음날은 일요일. 미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에서 미사를 간 것은 북경 한인미사를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뿐이다.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하던 때 서너번, 뉴욕주 버팔로에 변호사 시험을 보러간 때 (제발 붙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 한번. 이 친절한 포르투갈인들이라면, 내가 기도문을 읊지 못하고 전례 순서를 제대로 못 따라가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용기가 났다.
포르투 대성당(Sé do Porto)은 예상대로 아름다웠다. 성당 문앞에 젊고 키가 큰 남자가 지키고 서 있어, 혹시나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들여보내주지 않는 것 아닌가 잠시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미사를 보려고요, 라고 하니 환영하며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전례가 잘 보일만큼 충분히 앞에, 그러나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이 남들 눈에 크게 거슬리지 않을 만큼 맨 앞은 아닌, 적당한 앞줄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국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미사의 전례 순서가 전세계 모두 같은가보다. 절차 하나하나 진행되기 전에는 기억이 안 나도, 실제 진행이 되면, 아 어떤 기도문을 외는가보다, 어떤 의식을 하는 거구나, 익숙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신부님 강론시간은 거의 언어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들었다. 포르투갈어는 일응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와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확실히 다르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이 어떻게 다른 거지? 좀 더 우아한 구석이 있는 건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스페인어는 싫어했으면서 포르투갈어에 매료되어버린 지점은 도대체 어디일까. 잘 모르겠다.
강론과 봉헌, 성찬 예식이 모두 끝났을 때, 신부님이 처음으로 영어를 썼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탄절 잘 보내시고 좋은 연말연시 되세요. 좋은 일요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문장 하나하나, 살면서 수도 없이 들었을 말들인데, 근 한시간만에 처음 알아듣는 말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가 그렇게나 진심을 다해 말한 것이었을까.
새하얀 눈밭을 밟는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음에 새겨졌다. 뽀드득, 조용하지만 무게감 있게, 비워져 있던 공간을 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