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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Jan 11. 2024

춤추는 스파이더맨과 담배피는 노숙녀

혼자일때 비로소 보이는 것

어제 하루를 꼬박 집에서 쉬었다. 얼굴 전체가 온천이라도 된 듯 콧물과 가래로 부글거렸다. 토마토 수프를 한솥 끓여 종일 먹었다. 하몽을 통째 넣고 끓였는데, 하몽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슈퍼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골라왔지만, 보관이 잘못되었는지 (종이 분리막이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살코기 부분이 뭉쳐 있어, 한 겹씩 떼내는 것이 불가능한 하몽을 해치우기 위한 대책이었다.

근본 없는 수프 레시피가 궁금한 분이 계실까 싶긴 하지만 공유하자면, 내가 수프를 대충 끓이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버터 한두조각을 넣고 마늘편과 양파 다진 것을 넣고 볶다가 바칼랴우/앤초비/냉동해물/소시지/하몽과 같이 감칠맛과 짠 맛을 동시에 내는 식재료를 한두가지 넣고 좀 더 볶는다. 오레가노를 듬뿍 뿌리고, 브로콜리/샐러리/당근/방울양배추 같은 채소를 그 다음에 넣고 살짝 볶다가 토마토 소스를 적당히(사실은 아무렇게나) 둘러주고 일이분 볶다가, 물을 모든 채소가 잠길 만큼 붓고 끓어오를때까지 기다린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생파슬리와 생바질과 같은 허브가 있다면 이때 넣어 좀 더 끓이고, 아니라면 그냥 불을 끄고그릇에 담아 올리브유를 두바퀴 두른다. 좀 더 배부르게 먹고 싶으면 푸실리를 반주먹 정도 넣고 끓여도 좋다. 단백질 재료가 육고기인 경우, 디종 머스타드나 발사믹 식초를 아주 소량만 추가해도 변주되는 맛을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는 비싼 유럽의 식재료를 마음껏 활용하는 재미도 있다.


하루종일 뜨겁게 우린 차를 마시며 쉬었는데, 저녁즈음이 되자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와인을 마시면 좀 더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Vallado의 Touriga Nacional 2019 (22 EUR)를 한 잔 따라 마셨다. "Touriga Nacional"은 포르투갈 포도 품종인데, 도오로 밸리(Douro Valley), 다우(Dão), 그리고 비뇨 베르데(Vinho Verde) 지역에서 재배된단다. 탄닌이 강하고 허브같은(약간 화하면서도 슬쩍 달콤한) 향이 먼저 나고, 짙은 베리향이 난다. 드라이하면서, 다양한 향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확실하게 피어나는 것이 내 입맛에 딱 맞다. 글을 쓰는 (여전히 코를 찔찔거리는) 지금도 한 잔 마시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와인은 숙면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어찌저찌 잠에 들었다. (Jose Maria da FonsecaMoscatel Roxo de Setubal 2019, 디저트 와인까지 한 잔 더 마신 것은 숨기고 싶기도 하지만, 그 맛있는 디저트 와인, 어딘가에 언급을 해두어야 나중에 기억을 하지, 싶어 구태여 사족을 붙여본다. 건살구향이 나면서 매실주도 연상되는, 상큼하고 달콤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디저트 와인이다.)




오늘은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나갔다 와야했다. 나는 쉽게 우울해지는 스스로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무기력감을 경계한다. 대개, 나가서 걷다보면 줄곧 내면으로만 향하던 의식이 환기되어 침잠을 멈출 수 있다. 일단 사야할 것이 꽤 있지 않은가. 코 푸는데에 두루마리 휴지를 다 썼다. 또, 차를 우려먹다보니, 생레몬을 넣어 향긋하게 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밖에 나가 휴지와 레몬을 사 오는 것. 그 정도는 해낼 수 있지.


막상 밖에 나가니 슈퍼만 가는 건 좀 아쉽다. 정처 없이 걷다보니, 나올 때 그쳐있던 비가 다시 한두방울 추적추적 내린다. 나 우산 챙겼거든? 자랑스레 우산을 펼쳐들고 계속 걷는다. 포르투 대성당이 보인다. 그렇다는 건... 루이스 다리와 모후정원이 근처라는 이야기. 스무번을 가깝도록 다녀온 모후정원을 또 가기로 한다. 비가 와 그런지, 루이스 다리 위에서 사진 찍는 관광객이 좀 적어진 것 같다. 다리를 건너며 생각해보니, 비 내리는 도오로 강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서는 모후정원보다 세라두 필라르 수도원이 더 적격일 듯 하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은 바람이 세지 않았는데, 수도원에 올라가니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우산이 두번이나 뒤집혔다. 코를 하도 풀어 벌겋게 튼 인중으로 (꼴사납게) 찍으려 했던 브이로그는 관두고, 우산이나 제대로 들어야겠다. 바람의 방향에 맞춰 두 손으로 우산을 부여잡은 채 강가를 바라보는데, 눈에 띄는 이가 있다.


'마카레나'에 맞춰 춤을 추는, 스파이더맨 복장의 왜소한 남자. 영상 10도이기는 하지만, 스파이더맨 코스튬 한 장만을 입고 있기에는 추운 날씨다. 내복을 두 장 껴입었어도 춥지 않을까. 나는 폴라티에 플란넬 셔츠, 경량패딩까지 껴입고 나왔는 걸. 아무리 지켜봐도, 그의 춤을 보려고 발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래도 그의 춤은 그칠 줄을 모른다. 비와 바람을 맞으면서도. 비겁하게도, 나는 그가 나를 볼 수 없는 높은 곳에서 그의 사진을 찍었다.

마카레나 춤을 추는 스파이더맨, 찾아보시라

발걸음을 돌려 집 근처 슈퍼로 향하는 길, 여성 노숙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보니 익숙한 위치, 익숙한 장면이다. 건물 외벽에 담요를 여러겹 둘러 잠자리를 만든 그녀는, 내가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혼자 그 곳을 지나칠 때에도 같은 거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당시 '저 사람이 담배를 살 돈이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한 바 있어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비흡연자라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나 눈이 내리는 날(체감온도가 낮아지는 때), 유난히 담배를 피고 싶어했던 주변인들을 떠올려보자면, 분명 추위(그리고 어쩌면 고독감)에는 뜨거운 담배연기가 도움이 될  테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똑같은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도, 그녀에게 담배가 있어서 다행이다, 와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낮에 본 그녀의 얼굴이 생각보다 젊어서였을까. 직전에 춤추는 스파이더맨을 봐서였을까. (쓰다보니, 독감을 앓으면서도 와인을 ㅊ마시고 있는 나나 그녀나 다를게 뭔가 싶은 마음도 든다.)


당연히, 그녀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대신에 노숙자가 밤낮 구분없이 거처로 삼을 수 있는 이 건물은 도대체 무슨 건물인가, 싶어 건물 표지판을 찍었다.

상 주앙 국립극장에 대한 소개문. 그마저도 낙서로 더럽혀져 있다.

상 주앙 국립극장이란다. 안내 표지판마저 낙서로 더럽혀져 있다. 정문으로 와서 보니, 지금도 극장으로 운영중인 것 같다. 그런데도 외부에 상시 거주하는 노숙자와 그녀가 마련해둔 잠자리를 연중 그대로 두는 것인가. 인간적인 것 같기도 하면서, 도시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냉정한 생각도 든다.


사실 이것이 아름답고도 정취로 가득한 도시, 포르투의 (다소 을씨년스러운) 이면이다. 건물의 외벽은 멋진 벽화로 꾸며져 있기도 하지만, 예술적 가치를 정의하기 힘든 낙서로 도배된 곳이 훨씬 많다. 국제정세를 반영해, 인기문구는 "Free Palestine!"과 "F**k Israel"이다. 여긴 팔레스타인 이민자가 많은가, 라고 중얼거리던 내게 현실주의자 남편이 말했었다. '건물에 낙서하는 계층'에 팔레스타인 이민자가 많은 것 아니겠느냐, (대체로 부유한) 이스라엘 출신이 건물에 낙서를 하고 있겠느냐.


여행객으로서 '유럽치고 싼 물가'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반대급부로(대가에 비해 이득이 훨씬 크지만) 도시의 비탄이 느껴지는 광경을 때때로 맞닥뜨리게 된다. 골목골목, 넉넉치 못한 도시재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동 루이스 다리 초입, 다리 바로 아래에 있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모두 이끼덮인 폐허로 남아있다. 역사적인 가치를 살리면서 재건을 할 만큼의 예산이 없어서가 아닐까. 포르투 대성당 (및 모후정원)으로 향하는 지름길인 좁은 골목 R. de Cimo de Vila는 항시 오줌 지린내가 난다. 바탈랴(Batalha) 역에서 대성당이나 모후정원까지 가장 가까운 길이라, 수많은 관광객이 오고가는 길일텐데도 그렇다. Foz do Douro 근처까지 걸어가다 본, 구멍 뚫린 외벽에 채워넣은 쓰레기들도, 낯선 이의 유머감각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지만, 입안의 끝맛이 씁쓸했다. 도대체 건물에 구멍은 왜 뚫리게 된 것이며, 왜 그 구멍을 행인(들)이 들고 있던 쓰레기를(들을) 집어넣을때까지 막지 않았는지, 쓰레기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틈에 박혀 있었던 것이며 앞으로 얼마나 먼 미래까지 그 틈을 지키고 있을 것인지. 약하게나마, 암담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미소의 끝이 씁쓸했던 장면

그렇게 다소 위선적인 상념들도 잠시. 여행객은 '유럽치고 싼 물가'를 누리기 위해, 외출의 종점인 슈퍼 Continente Bom Dia로 향했다.  


슈퍼에 들어설 때 그녀는 휴지와 레몬만이 필요했지만, 왜째서일까. 슈퍼를 나오는 그녀의 장바구니에는 Vinho Verde 화이트 와인 한 병, 사과식초, 발포비타민, 루이보스 티백, 블루베리, 파인애플, 그리고 샐러리까지 들어있었다.


선생님, 누가 보면 일년은 더 여기 사시는 줄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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