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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Jan 09. 2024

아아, 그는 갔습니다

독감을 내게 남기고

건강체질이네 어쩌네 자신있게 떠들었던 것이 누구였던가. 바이러스에게 온 몸을 잠식당했다. 어제부터 콧물과 기침이 잦아지더니, 오늘 새벽에는 코가 막혀 잠에서 깼다. 그리고 저녁이 된 지금은 코를 하도 많이 풀어 인중이 쓰라리고, 기침을 할 때마다 머리가 울린다. 


세상 모든 화(禍)가 오빠(남편) 탓인 나는, 기침이 날 때마다 그를 흘기며, 가져다 줄 것이 없어 독감을 가져다 주느냐고 핀잔을 놓았다. 그는 죄책감에 어쩔줄 몰라하기는 커녕, '그것 참 옹골지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렇게 시덥잖은 투정을 시덥잖게 받아치는 반응을 보는 게 좋아, 틈만 나면 '서울발 독감 배달'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이 와 있던 11일간, 해보고 싶었던 모든 일을 다 했다. 나 혼자서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것들까지 남편 덕분에 경험해보았다. 남편과 내가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로, 남편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호기심을 갖는다. 반면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 줄을 서 있어도, 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유행에 둔감하고, 오히려 유행하는 것이라면 쓸데없는 저항감마저 갖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몰개성하게만 비춰지던 주류와 대세의 문물이, 내가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남편)이라는 렌즈가 덧씌워지면 흥미로워지고는 한다. 물론, 그런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는 순간에도 나는 남편을 군중심리의 노예라고 놀리고, 남편은 '너는 그래서(세상에 관심이 없어서) 사업을 하면 망하기 딱 좋아'라고 일갈하기 일쑤다. 


남편 덕에 경험한 것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정어리 통조림. 포르투에서는 전통 식료품 가게에서부터 슈퍼마켓, 기념품 가게까지 다양한 상점의 인기품목이다. 남편은 '포르투에서 사가야 할 것'과 같이 나라면 떠올려보지 못했을 검색어로 리서치를 한 후, 정어리 통조림을 먹어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파스타를 요리할때 곧잘 넣어먹곤 했던 앤초비(Anchovy, 멸치) 절임과 비슷하게, 요리의 밑간에 활용하여 감칠맛을 더하는 용도의 (매우) 짠 절임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걸 꼭 먹어봐야 아나? 싶었지만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슈퍼에서 2.7유로짜리 미네르바(Minerva) 통조림을 한 개 사주었다. 그런데 실제 먹어보니 내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짜지 않고, 매우 신선하고 촉촉한 맛으로, 등푸른 생선의 고소함은 살아있지만 비린내를 잡기 위한 인위적인 향이나 공정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식사빵에 얹어 먹으니 극락이다.


뿐만 아니다. 그동안 숱하게 'Vinho Verde' (Vinho는 와인, Verde는 초록색으로, 영문 Green Wine이라고도 부른다)를 보아왔는데, 나는 무슨 뜻인지 한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남편의 독감이 많이 호전되어 그가 와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Vinho Verde를 한번 마셔보자고 했다. 와인이라면 마다하지 않지. 찾아보니, Vinho Verde는 포르투갈 북서부의 지역 이름으로, 해당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을 Vinho Verde (Green Wine)이라 부른단다. 이름과 달리 와인의 색이 초록색은 아니고, 화이트, 레드와 로제까지 있는데 화이트가 대표적이라고 한다. 덜 숙성시켜 상큼한 맛과 향이 특징으로, 알코올 함량이 낮다(8-11%). 지난 날 모후정원에서 혼자 마셨던 Gazela 브랜드의 화이트 와인도 Vinho Verde (Green Wine)였다. 


어제 남편과 슈퍼에서 사다 마신 Leira do Canhoto (7.59 EUR)은 기포가 많이 빠진 샴페인 같은 느낌으로, 산뜻하고 가벼우면서도 복합적인 향이 매력적이었지만 달지는 않았다. 한편, 오늘 Lareira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하우스 와인으로 주문해 마신 화이트 Vinho Verde (6.5 EUR) 는 그보는 맛이 덜했는데, 좀 더 달고 향이 단순했다. 남편이 오기 전 혼자 사 마신 Crasto의 슈페리어 화이트 와인 (16 EUR)과 Vinho Verde를 비교해보자면, 포르투 여행 중 마시기에는 일반 화이트 와인보다는 Vinho Verde 화이트가 좀 더 좋은 선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Crasto도 맛있기는 했지만 특징이 말보로의 쇼비뇽 블랑과 겹쳐서, 포르투를 여행하는 중 굳이 마셔보지 않아도 됐겠다 싶었던 데 반해, Vinho Verde는 현지에서 맛보지 못했더라면 나중에 크게 아쉬웠을 법 하기 때문이다.  

슈퍼에서 사다 마신 Leira do Canhoto (7.59 EUR)


그 밖에, 남편과도 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Foz do Douro까지 함께 걸어간 일, 혼자서는 다 못먹을까봐 아무것도 못 먹고 돌아왔던 Mercado Bom Successo를 다시 찾아간 것, 한 잔에 6.5 유로라는 비싼 가격 때문에 한번도 사먹지 못했던 모후정원의 Mulled Wine (뱅쇼)를 나눠마신 시간, 그 모두가 행복했다. 행복한 순간마다, 나는 참지 않고 남편에게 '오빠, 나는 오빠랑 하는 여행이 가장 좋아.'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며칠 후 이동하게 될 리스본도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귀국편 경유지인 이스탄불에서 스탑오버해서 이스탄불을 같이 여행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내가 처음 가는 여행지는 처음이라서, 가본 곳은 또 이전에 가보았다는 이유로, 남편과도 함께 해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Foz do Douro 근처 눕는 벤치에 누워 있는 남편. 간소하게 생겼는데 실제 누워보면 몹시 편안해 깜짝 놀란다. 
Mercado Bom Successo에서 남편과 사 먹은 점심 (13.95 EUR)
Mercado Bom Successo에서 사먹은 머랭 (3.2 EUR). 많이 안 달고 속은 쫀득한 것이 아주 맛있었다. 
남편과의 마지막 저녁, 모후정원에서 사 마신 Mulled Wine (6.5 EUR)




지독한 독감의 구렁텅이에 푹 빠져있자니 반성의 시간이 찾아온다. 몸이 아픈 것은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다. 지금 내 몸의 상태로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했던 남편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포르투에 도착하자마자 몸져 누워있는 남편에게, 그를 (들판을 향한 꿈을 안은) 망아지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아직 이스탄불과 인천 사이 어딘가의 상공에 떠 있을 남편. 그가 주고 간 것은 독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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