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다운을 30분 남겨두고 돌아온 마지막날
12월 29일,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남편이 왔다. 남편은 3시 25분에 포르투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나는 정오부터 목욕재계를 비롯한 외출 준비를 마친 뒤 식탁에 앉아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오후 1시에는 좀이 쑤셔 견딜 수 없는지라 집에서 제일 가까운 슈퍼 Minipreco에 들러 5L들이 생수를 두통 사 왔다.
영상편집도 하고 유튜브도 보고 브런치 글도 읽다보니 어느덧 오후 3시. 시간이 참 안 가는구나. 겨우 40분을 더 기다려 카톡을 보내봤다. "도착했나?" 그러자 남편에게서 도착해 수하물을 기다리고 있다는 답장이 왔다.
한 시간쯤 지나 드디어 그와 조우했다. 그는 내가 동묘에서 만원을 주고 산 중고 스웻셔츠를 입고 있었다. 집으로 가지고 와서 보니 목이 잔뜩 늘어나 있어, 외출용으로는 단 한번밖에 입지 못한 형광주황색의 thisisneverthat 스웻셔츠다. 하의는 역시 내가 홈웨어로 사준 조거팬츠. 방금 막 집에서 분리수거를 하러 나온 듯한 옷차림이다. 하기야,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기침을 하고 코가 막히며 감기기운을 보였던 그가 장시간 비행을 한 것이 용했다. 그는 비행기에서 코가 잔뜩 막힌 채로 내내 마스크를 하고 있어야 했고, 눈치가 보여 기침도 제대로 못했던지라 그야말로 죽을맛이었단다.
엘리베이터가 없지만 다행히 1층(한국기준 2층)인 집에 짐을 내려놓았다.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그 무엇도 먹고 싶지 않고 쉬고 싶은 남편에게, 나타(에그타르트)라도 좀 사다줄까, 물었다. 같이 갔다오겠단다. 다행이었다. 평소 디저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아무리 식욕이 없어도 디저트에는 관심이 아직 남아있는 듯 했다.
집에서 4분거리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여태 입맛에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한 브랜드 Nata de Lisboa 지점에 찾아갔다. 그는 세개를 먹고 싶다고 했고 나는 한개를 먹을 요량이었으므로 네개를 포장하려 했지만, 장사 수완 좋은 직원이 '6개는 8유로인데 (정가대비 고작 0.40유로 저렴하다) 6개들이를 사지 않을래,' 물었다. 나는 '그래 4개를 먹을 수 있으면 6개도 먹을 수 있지,' 하는 마음으로 알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 비가 한 두방울 내리는 듯 했지만 짧은 거리라 괜찮았다.
공항을 누비고 다니다가 비행기를 장시간 탔으며 독감 세균까지 잔뜩 머금고 있으면서도, 남편은 소파에 널부러져 씻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를 사랑으로 수차례 얼러 샤워부터 시켰다. 샤워를 하고 다시 멀끔한 내 남편이 된 남자가 나타를 세개 먹고, 나는 두개를 먹었다. 그리고 저녁 여덟시에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일어난 남편은 몸이 더 안좋아졌다고 했다. 오늘은 밖에 나가면 안될 것 같아. 안간힘을 내 말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이렇게 아픈데 유럽대륙까지, 버젓한 자기 집(엄밀히는 2년계약 월세집)을 버려두고 명분 없는 자취를 하는 정신나간 아내를 찾아오게 했다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 무리하지 말고 쉬자.
한개 남은 에그타르트는 그가 먹고, 나는 이틀전 백년노포 (무려 1896년 창업이란다) Confeitaria do Bolhão에서 사온 호밀빵을 잘라 먹었다. 점심무렵에는 Comer e Chorar por Mais (역시 백년노포로, 지나갈때마다 노인분들이 줄을 서 계시던 모습을 보고 꼭 가보려 다짐했다가 아침일찍 오픈런을 했다)에서 사온 햄과 치즈에 계란후라이를 곁들여 빵과 함께 먹었다.
그러자 슬슬 좀이 쑤셨다. 나는 내향인이지만 실내보다 실외를 좋아하는 인간이다. 남편이 내가 백년노포 햄을 맛 없어했던 것이 기억났다. 오빠, 슈퍼에서 사먹은 하몽이 맛있었는데 그걸 좀 더 사올까? 오빤 집에 있고, 라고 운을 띄웠다. 그러자 다녀오란다. 하여 나는 남편을 위해 하몽을 사러 간다는 특명을 가지고 슈퍼에 다녀왔다.
Continente Bom dia. 집 근처에서 가장 큰 슈퍼다. 하몽은 당연히 샀고, 그 외에 예상치 못한 품목을 추가로 구매했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이 와인을 두병이나 산 것이다. 지난번에 사먹은 Qunita do Infantado의 2018 LBV (Late Bottled Vintage)를 다시 한병 더 사려 했는데, 그새 3유로가 올랐다. 지난번에는 분명 16.99유로였는데, 19.99유로가 되어있다. 그때, Cruz의 2010 Colheita가 눈에 띄었다. 며칠동안 계속 세일가 14.99유로였던 것 같은데, 마치 이제서야 처음 세일을 하는 것처럼 가격을 대서특필해두었다. 며칠 전, 지나가던 할머니가 2010 Colheita에 이 가격이면 좋은 가격이라고 말해줬던 게 기억나 한 병 집어들었다. 그런데 어떤 포르투갈 아저씨가 와인섹션 직원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어드는 와인이 눈에 띈다. 세투발 와인이다. 세투발의 와인도 참 맛있다고는 들었는데... 상자도 예쁜 것이 맘에 든다. 나도 모르게 하나를 더 들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여느때보다도 신이 난다. 몸져 누워있는(아내의 음주를 꼴보기 싫어하는) 남편에게는 장 봐온 물건을 일일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하몽은 냉장고에, 와인 두병은 서늘하고 그늘진 곳 (구석 안보이는 곳)에 모셔둔다.
남편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유튜브 쇼츠를 시청한다.
아내는 이번여행 처음으로 신라면을 끓여먹는다. 슬프게도 신라면마저 남편의 후각과 미각을 소환하지는 못한다. 신라면 레드의 후추 끝맛을 Nine Port의 LBV(Late Bottled Vintage) 2019 와인으로 달래며 밤을 보낸다.
드디어 일년의 마지막날. 12월 31일이다. 7시 40분쯤 눈이 떠졌다. 혼자 있을때는 아무리 늦어도 6시면 기상했는데. 남편과 같이 자니 더 오래 잠을 잘 수 있는 것 같다.
남편은 아직 꿈나라. 화장실을 다녀와, 식탁에 앉아 에어팟을 끼고 영상편집을 하고 있으려니 남편이 일어났다. 천만다행으로 오늘은 컨디션이 좀 낫단다. 드디어 외출인가! 남편을 기다리며 그 맛있다는 프란세지냐도, 해물밥도, 문어도 아직 먹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기면 아까워 속이 상하지 않을까, 낭비하기 싫은 백수의 마음이기도 했고, 이왕이면 좋은 것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랑꾼 마누라의 마음이기도 했다.
오늘은 드디어 해물밥을 먹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못 먹었다. 남편은 아무런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는데 미식을 소비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운한 마음이 몰려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이 있으랴. 한 해의 마지막날을 함께 (그것도 외출까지)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하자.
한해동안 한번도 감기에 걸린 적 없는 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목도 간지럽다. 나도 옮은 것 같다고 하자, 남편이 보람찬 얼굴로 그래 안 옮으면 이상하지, 라고 한다. 그래, 하루종일 화분에 물 주듯 기침을 뿌려댄 침대에서 간밤을 잤으니, 안 옮으면 이상한 일이지.
집 문을 나서려는데, 남편이 오한이 들었는지 옷을 다 입고서도 자기도 모르게 '추워'를 나지막이 내뱉었다. 목도리를 둘러주려는데 진저리를 치며 싫단다. 거추장스럽고 챙기기 귀찮다는 이유다. 나는 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무슨 말과 표정으로 화를 냈는지 기억이 잘 안날만큼. 여하튼 남편을 겁박하여 목도리를 두르게 하는데 성공했다.
Confeitaria do Bolhão의 가게 안쪽 테이블에 앉아 빵과 커피를 먹었다. Cachitos라는 크라상 비슷한 모양새의 빵 안에 하몽과 크림치즈가 가득 든 것 하나(2 EUR)와, 얇은 도우 안에 각종 햄과 초리조, 치즈가 겹겹이 잔뜩 들어간 것 한 조각 (라자냐처럼 크게 한 판을 만들고 조각을 잘라 파는데, 우리가 산 것은 4.76 EUR - 영수증에는 Bola Rustica라고 쓰여있지만 해당 빵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같진 않다), 그리고 에그타르트 한 개 (1.3 EUR), 에스프레소 마키아또 작은 사이즈 (1.3 EUR), 더블 에스프레소 (2.2 EUR)를 시켰다. 총 11.56 유로. 빵을 이등분해서 내어주셨는데, 절반씩은 다 못먹고 포장해왔다. 일요일이라 볼량시장은 문을 닫았다.
여행준비 안 하기로는 부부가 일심동체. 상벤투(기차)역 안을 구경하자니 남편이 상벤투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려 한다. 잘난척하며 기차역으로 끌고 와 내부를 보여줬다. 포르투 대성당은 들어가지 않고 외부만 구경을 했다. 나는 지난번 미사 후 둘러봐서 그런지 매표가 필요하지 않았는데,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매표가 필요한 듯 싶어 들어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슬슬 부츠를 신은 내 발의 발가락도 아파오고, 남편도 지쳤다. 집에 들어가서 쉬었다가 다시 나오자.
집에 들어가는 길, 핑구도스 (pingo doce) 슈퍼에서 (신년휴업 대비) 장을 보려고 했는데, 사려고 계획한 품목 1) 사과 2) 5L 이상 대용량 생수 3) 다크초콜렛 모두 맘에 드는 것이 없다. 사과는 신선해보이지 않고, 생수는 대용량 패키지가 없으며, 초콜렛도 비싸고 맛이 없어보인다. 대신에 입구부터 Sandeman Tawny 20년이 진열되어 있어 집어들었다. 44.9유로로, 평소 사던 10유로대 와인에 비하면 비싼 가격이지만, 볼량 시장에서 Graham Tawny 20년을 48유로에 팔고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꽤 싼 가격일 것이라 추론했다. 그리고 올리브유 한병을 다 먹어가므로, (다 먹은 것과 똑같은) Gallo 브랜드의 버진엑스트라 리제르바 올리브유를 9유로에 구매했다. 역시 와인에 진심인 사람들이라 그런지 올리브유도 정말 맛있다. 슈퍼에서 산 0.24유로 빵에 올리브유만 찍어먹어도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집에 돌아와, 뜨거운 가향 루이보스 차를 연거푸 마셔대니 감기기운이 좀 가시는 것 같다. 남편에게도 뜨거운 물을 계속 마시라고 했더니, 온갖 민간요법을 무시하는 그가 '유사과학'이라는 실언을 했다. 의사 선생님들도 물 많이 마시라고 한다고! 찾아 봐!
오후 4시반쯤, 다시 외출해 모후정원의 일몰을 보러 갔지만 날이 잔뜩 흐려 노을을 볼 수 없었다. 정원 옆 세라두 필라르 수도원(Monastery of Serra do Pilar)에 올라가 동 루이스 다리와 도오로강을 내려다보았다.
모후정원과 수도원 사이 길가에 츄러스 스탠드들이 예닐곱개는 들어서 있었다. 포르투에 온 후 혼자서 모후정원만 열 번쯤 갔는데, 늘 이른 시각에 귀가해서 그랬는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익살스러운 그림과 문자로 발랄하게 꾸며진 간판들이 놀이공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평소 단 것을 좋아하는 남편. 츄러스를 보고 식욕이 일었는지 본인도 사 먹어야겠단다. 남들처럼 다발을 들고 다 먹을 순 없으니 딱 한 가닥(0.80 EUR)만 사주었다. 판매원이 슈가파우더와 시나몬파우더를 잔뜩 묻혀준 츄로를 건네며 봉 아노 (Bom Ano)!라고 외쳤는데 해피뉴이어란 뜻 아니겠는가, 대견하게도 즉각 알아들었다. 더 큰 목소리로 봉 아노! 화답했다.
츄로의 맛은 스페인에서 먹은 것처럼 쫄깃한 식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 맛에) 맛이 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한 개씩 손에 들고 있는 좀 더 두툼한 가닥이 눈에 띈다. 그러고보니, 가게 이름에 Churro외에 Fartura라는 것도 많이 보이는데, Fartura가 츄로의 뚱뚱한 버전인가보다.
집에 돌아오는 길, Manteigaria에서 나타를 두 개 포장해 집으로 들어왔다. Manteigaria는 에어비앤비 호스트 입맛에는 가장 맛있다는 나타 집이다. 크림에서 버터향이 좀 더 진하게 난다. 함께 마시라고 며칠전 Fabrica Coffee Roasters에서 사 온, 기막히게 맛좋은 에티오피아 구지 원두로 커피를 내려줬는데, 남편은 냄새가 나지 않으니 그저 쓴 물 같다며 마시다 말았다. (...)
Sandeman Tawny 20년을 개봉해 맛을 보았는데 꿀맛도 이런 꿀맛이 없다. 야생잡화꿀에서 나는 것 같은 조화로운 신맛과 단맛, 과일향이 먼저 나고, 캬라멜향도 나기는 나는데 어느 것 하나 혼자서만 젠체 하는 향이나 맛 없이 밸런스가 딱 좋다. 지난번 볼량시장에서 시음했던 같은 브랜드 20년 Tawny는 이렇게까지 맛있지는 않았는데. 개봉 후 수개월까지도 보관 가능하다고 하더니, 개봉한지 꽤 되어서 그랬을까. 아파서 알코올을 입에 대지 못하는 남편에게 맛을 못 보여주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12월 31일 마지막날은 Aliados 역 앞 광장에서 10시반부터 다음날 1월 1일 자정을 넘길때까지 행사를 한다고 했다. 아마 카운트다운도 하겠지. 남편을 채근해서 10시를 좀 넘긴 시각에 집을 나섰다. 경량패딩 하나만 입겠다는 걸 다그쳐서, 그 위에 후리스를 하나 더 걸치도록 했다.
무대 앞 의자는 당연히 다 찼겠다, 예상하긴 했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서서 시야를 확보하는데만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맥주스탠드에서 맥주를 사와 한두잔씩 들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고, 어디선가는 대마를 피우는지 대마초 냄새가 계속 났다. 일반 연초도 질 수 없었는지, 군데군데서 연기와 냄새가 피어올랐다.
공연은 대중음악 같은 것이었는데, 남자 가수가 랩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여자 코러스가 두 명 있었다. 나는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았지만, 남편 말로는 무대 위에 드럼, 퍼커션, 베이스, 기타, 키보드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음악의 장르로 따지자면 힙합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는데, 나는 그들의 음악에서 2000년대초 한국의 힙합그룹 허니패밀리의 '좋은 아침'이란 노래를 떠올렸다.
무대 뒤 스크린에 커다랗게 WE TRUST라고 계속 뜨는 걸 보면 그게 밴드 이름인가 싶어 검색을 해봤다. Andre Tentugal이라는 사람이 만든 프로젝트 밴드란다. Andre Tentugal은 82년생이며... 계속 읽으려는데 핸드폰 네트워크가 갑자기 3G로 바뀌면서 하얀 화면만 나왔다. 같은 광장에 인파가 원체 많이 몰렸던 탓이다.
11시부터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카운트다운을 할 수 있다고? 삼십분쯤 더 지났을때,아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싶어 남편에게 집에 가자고 했다. 남편도 (담배연기에) 목이 아프다고 했다.
나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카운트다운을 삼십분 남겨두고 지금 자리를 뜨는 사람은 우리뿐이었기 때문. 어찌저찌 겨우 빠져나와 보니, 광장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골목골목에서 차려입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모여들고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때는 11시 46분.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워 남편이 핸드폰으로 시청하는 유튜브 쇼츠를 함께 봤다. 남편 유튜브 계정에는 고양이 영상이 압도적으로 많다.
밖에서 폭죽소리같은 것이 들려왔다. 이제 잘까, 시간을 보니 12시 15분이다. 새해구나.
아연과 마그네슘, 오메가3와 아스타잔틴을 한 알씩 함께 먹고 잠들었다. 이 장면에 함께 들어와 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고마웠지만 안 고마웠다가, 결국엔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