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척박사 폴란드 언니와
12월 19일은 최저온도가 3도로, 포르투에 온 이후 가장 추운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눈을 시리게 할 만큼 차가운 그런 날. 겉옷이라고는 경량패딩과 후리스밖에 가지고 오지 않아, 개중에 따뜻한 것들로 골라 최대한 껴 입었다. 비니를 쓰고 장갑을 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그저 아직 안 가본 방향으로 걸었다.
걷다보니, 마니또가 몰래 책상에 놓고 간 선물처럼,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추천했던 빵가게 Padaria Ribeiro가 나왔다. 어쩌지, 새벽부터 잔칫상을 차려먹고 나와서 아직 배가 부른데….
아직 시차 때문인지 매일 이른 새벽마다 일어나고 있는데, 깜깜하고 조용할때 나 혼자 일어나서 그런지(응?), 항상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프다. 빵과 치즈, 달걀 등 이것저것 주워먹고 외출을 할 때쯤이면 늘 배가 불러, 밖에서는 도통 식사 생각이 나질 않는다. 게다가 포르투가 유럽에서는 물가가 싸다지만, 다 먹지못할 음식을 경험삼아 주문하기에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부담스럽다. 기상시간이 늦어진 후로도, 딱 나 먹을만큼 숙소에서 음식을 준비해 먹는게 습관이 되어버려, 남편 오기 전까지는 외식다운 외식을 해보지 못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 들어갔는데 어르신들 몇 분이 가게 안쪽 구석에 서서 디저트나 스낵을 에스프레소와 함께 드신다. 그런데 그보다도 많은 손님들이 빵을 상자에 담아 포장해 가고 있다. 그래, 포장!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도 포장을 해가면 되겠구나.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비건 패스츄리를 고르고, 머랭 한 조각을 더했다. 20대에 한참 좋아했던 당근케잌이 있어, 살까말까, 망설이다 함께 샀다. 모두 다 해서 4유로 초반대. 배가 좀 꺼지면 어디 공원 같은데 앉아 한가로이 비건 패스츄리를 뜯어먹겠다는 계획이었다.
며칠전 Aliados역에서 관람한 무료 야외공연 중, 전광판에 다음 연말공연 장소로 언급되었던 정원이 근처에 있는 것 같다. Jardins do Palácio de Cristal. 수정궁 정원이라니, 이름부터 호화롭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웬 닭들이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직원이 키우는 반려 닭들일까, 궁금해하며 정원 안으로 들어가니, 한층 더 화려하게 치장한 공작들까지 합세한다.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는데, 닭들이 시골 농부를 깨우려는 중차대한 임무라도 있는 양, 열과 성을 다해 운다. 도대체 무슨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걸까. 자기들끼리 하는 말일까,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일까.
해가 잘 드는 벤치에 앉았는데, 아직도 뭘 먹고 싶은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이토록 추운 날이니 가방 속 빵이 상하지는 않겠지. 빵 대신 아이패드를 꺼내, 브런치에 포르투 대성당에 갔던 이야기 초고를 썼다.
이제는 강가로 좀 가볼까. 히베이라 광장에 거의 다 걸어왔을 때, 전방의 길 끄트머리에 ‘the wine box’라는 와인 가게가 보였다. 와인 테이스팅을 할 수 있고, 직원들이 친절하다고 후기에서 본 적이 있어 언젠가 가볼까 생각만 했던 곳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들러보자.
한시 반, 다소 늦게 점심식사를 시작하는 손님들이 꽤 있었다. 구석진 2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옆에도 혼자 온 여자가 있어 왠지 모를 반가움이 느껴졌다. 통통한 여직원이 와서 반갑게 인사하고 메뉴판을 놓고 갔다. '레드' 섹션에서 산지가 '도오로(Douro)'인 것 중 드라이하고 바디감이 있을 것 같은 것을 골라 가장 작은 한잔(70ml) 을 시키려고 하니 여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와인을 다 개봉할 순 없으니, 이미 개봉한 것들을 시음하게 해주겠단다.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이해가 됐기 때문에 알겠다고 했다. 네가 고른 것은 풀바디 와인인데 풀바디를 좋아하느냐 해서 그렇다, 그런데 너무 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이로써 Tawny를 포함한 모든 포트와인은 제외되었을 것이다), 했더니 드라이한 와인을 시음시켜주마고 했다.
젊은 남자 직원이 와인 한 병을 들고 왔다. Piano의 그랑 리제르바 2017 (5 EUR/70ml) 였는데, 드라이하기는 했지만 풀바디라고 하기에는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왜 이리 밍밍하지? 그래서 이건 별로인데. 더 바디감이 있는게 있을까? 라고 했더니 남자 직원이 이거보다도 더? 라며 살짝 불쾌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가, 다른 와인을 다시 가져왔다. Bafarela의 그랑 리제르바 2021 (5.5 EUR/70ml). 개봉한지가 첫번째보다도 더 오래된 듯, 더욱 무향무취에 가까웠지만 다른 점이, 약간 달았다. 그래, 향보다는 맛이 오래 가지. 차라리 이게 낫겠다 싶어 이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남자 직원이 퉁명스러워, 나도 더 이상 말을 오래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이제껏 포르투에서 마신 것 중 가장 맛 없는 와인이었다. 실망스런 기분으로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바로 옆자리의 여자가 예의 통통한 여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렸다. 본인이 주문한 요리의 대구 요리법이 궁금한가보다. 대구를 자기네 나라에서도 많이 먹는데, 이렇게 꼬득꼬득하게 요리한 것이 신기하다고 이야기했다. 무슨 요리였길래…? 여직원과의 대화를 마친 여자에게 물었다. 대구가 들어간 샐러드였는데, 굽지도 않았는데 꼬득꼬득한 식감이 나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속으로, 그건 염장 대구 (바칼라우)가 아니었을까, 난 아침에도 불려둔 바칼라우를 넣어 토마토 수프를 끓여먹었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체를 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자꾸만 ‘본국에서는’ 대구를 어떻게 요리해먹는다는 이야기를 해서, 네 본국이 대체 어디기에? 라고 물었더니 폴란드에서 왔단다. 포르투에서 가까운 소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방문하러 놀러와 있단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은 아직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데, 사진으로 보니 자연풍광이 참 멋지더라,' 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자연풍광이라고…? 의아해서 되물었다. (대체 뭘 본 거지?) 우린 국토가 작아서 자연적인 걸로는 그다지 특별한 자원이랄게 없는데, 국토 면적 삼분의 일인 산림 사진을 봤니? 라고 하자, 그녀는 그렇다며, 원래 나고 자라 익숙한 것들은 평범하게 느껴지지, 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아주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내게 유럽대륙의 구석구석을 다닌 이야기를 해주었을 뿐 아니라, 눈치도 왜 그리 빠른지, 지리적인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할 때 내 초점이 조금이라도 흐려지면, 구글맵을 꺼내 이야기의 지리적 위치를 보여주고는 했다. 그래서 허심탄회하게 고백했다. 난 포르투갈 오기 직전까지도 포르투가 리스본보다 남쪽에 있고 더 따뜻한 줄 알았어. 아하하, 정확하게 반대인데! 라고 그녀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인 망신은 내가 다 시킨걸까.
그녀가 대구요리 (냄새로 감바스인줄 알았던)의 빈 접시를 물리고, 푸딩같은 디저트가 나왔다. 남자직원이 디저트와 함께 마실 와인을 들고 오자, 폴란드 여인은 가방에서 여러번 접은 종이조각을 꺼내 남자직원에게 보여주며, 이 와인으로 가져다달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직원이 이왕 (제멋대로) 가져왔으니 이것도 마셔보지 그래, 하고 가져온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녀는 한 모금 마셔보곤, 아니, 이거 말고 20년(숙성)으로 가져다 줘, 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연후에 20년 숙성 와인을 다시 따라주자, 이내 만족스런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폴란드 여인은 어제도 이 가게를 왔었단다. 그때 같은 와인을 마신 뒤 추위에 언 몸이 포근히 녹은 경험을 잊지 못해 돌아와 다시 주문했다고. 그 와인 나도 좀 마셔보자 싶어, 같은 것을 주문했다. DEVESA Tawny 20년 (7.5 EUR/70ml). 아니 이런 맛이! 분명 달콤한 캬라멜 향이 나는데, 노골적이지도 인위적이지도 않아 조금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뭐야, 나 캬라멜향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이어 건과일의 향까지, 아주 자연스럽고도 조화롭게 어울린다.
옆자리 폴란드 여인이 푸딩과 토니를 마저 즐기는 동안, 무지렁이 한국인은 폴란드가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도 기온이 떨어지지만, 여름에는 40도를 육박할 정도로 더워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탈리아 스트롬볼리(Stromboli)의 활화산에 대해서도 처음 들었다. 곧이어 그녀는 본인이 살고 있는 폴란드 도시 Lidzo 설산의 사진도 보여주고, (내가 십분 뒤면 까먹을) 산의 고도까지 알려주었다.
그녀가 한국인들은 열정적이고 좋은 사람들 같더라, 며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에 대해 물었다. "글쎄, 그런 면도 있기는 한데 양날의 검처럼, 그에 따르는 집단주의적인 면도 있어. (나처럼) 외곬수면 좀 힘들 수도 있지. 어디든 소속 집단에서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규칙들 같은게, 일원들한테는 엄격하게 적용되잖아." 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그건 폴란드도 마찬가지란다.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그렇다고. 크리스천하고 카톨릭 인구가 많다보니, 이런 크리스마스 시즌에 각종 예식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그럴수가’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고 했다. 전지전능한 존재와 힘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바람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나이롱 카톨릭 신자인 나는, 그녀가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고 개인성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서도, 전지전능한 존재를 믿지 않고도 오뚝 서서 삶을 살아내는 자신감이 부럽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녀가 아까 퉁명스런 남직원에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 20년." 할때 본 옆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가게를 나서기 전, 서로의 왓츠앱(Whatsapp) 계정을 추가했다. 다음날 오후, 그녀에게서 아베이루(Aveiro)와 리스보아(Lisboa, 리스본)에 가고 있다는 메세지를 받았다. 그 후에는 폴란드로 돌아가 업무에 복귀할거라고.
어제는 덕분에 정말 재미있었어, 한국에 오면 꼭 연락 줘, 라고 회신했다. 정말 언젠가는 서울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