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티카 Stica Jan 16. 2024

뜻대로 하소서, 너무 세게는 말고 살살

파티마(Fatima) 버스여행

독감 때문에 근 이틀을 집에만 있었다. 다음주 월요일 리스본으로 떠나기 전, 포르투에서 보내는 마지막 한 주였다. 일기예보에서 딱 하루가 '맑음'인 것을 보고, 근처 소도시라도 다녀와야 하나, 고민만 하던 중, 바로 전날 파티마로 가는 버스를 예매했다.


버스 출발시간은 8시 15분. 볼트 택시를 타고 캄파냐 버스터미널까지는 10분 정도가 걸렸다. 요금은 3.7유로. 8시가 거의 다 되어야 해가 뜨는 시기여서, 버스 출발과 함께 막 떠오른 해를 구경할 수 있었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나무와 들판이 푸르렀다.

포르투에서 파티마로 가는 아침 버스

당초 소도시를 여행할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유독 교통수단에 관련한 실수가 잦고 덤벙거리다보니, 기차나 버스 여행에 대해서는 낭만보다 심란함을 먼저 느낀다. 타야 할 기차의 플랫폼, 열차의 칸이나 좌석 따위의, 다들 직관적으로 알아봄직한 기호와 순서, 위치가 나는 어렵게 느껴진다. 늘상 잡념에 휩싸여 있어, 걸핏하면 안내방송을 못듣고 지나치거나, 전광판에 뜬 실시간 정보를 놓치고는 한다.


그런데 오늘 도전해보니 이만큼 쉬운 일도 없다. 내가 이 따위를 두려워했다는 걸 누군가 알게라도 된다면, 어딘가 좀 모자라는 인간이라는 인상을 남길지 모르겠다. 물론, 택시기사가 내려준 터미널 입구에서 안쪽으로 좀 더 걸어들어가기만 하면 플랫폼인 것을 모르고, 구태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에 올라가, 휴게실과 흡연실, 화장실까지 한바퀴를 빙 둘러보고서야 플랫폼이 없음을 확인하긴 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버스를 어디서 타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전날 잠을 잘 못 자 피곤했는데 막상 버스에서 자려고 하니 잠이 오지 않아 눈만 감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멈춰섰다.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나, 까무룩 잠에 들었던 것인가, 놀라 시계를 보니 아직 10시. 예정 도착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한 건가? 가방을 챙겨 드려는데 기사가 외쳤다. ‘코임브라!’ 그러고보니 파티마에 도착하기 전 파티마에 우선 정차한다고 했지. 그런데 두 시간이나 걸렸는데 아직 코임브라라고? 핸드폰을 보니 9시다. 버스 시계의 시간이 잘못되었던 것. 안도하며 다시 등을 좌석에 기댔다. 코임브라가 이렇게 가깝구나… 코임브라를 가지 않아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인기관광지 코임브라를 제끼고 파티마를 가기로 한 것은, 신실하지는 않아도 신앙심이라는 게 내게 있기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을 간다고 했더니, 엄마가 파티마 성지순례 목적으로 포르투갈을 가기도 하는데, 포르투갈까지 갔다면 파티마를 들렀다 오는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기적수(ㅋ)를 마시고 오라고 했다. (’기적의 샘물‘로 유명한 다른 성모 발현지와 헷갈리셨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나는 어렸을 적 읽은 <파티마의 기적>이라는 책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는 책 사는 데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딱히 다른 놀이거리가 없었던 나는, 사 주는 족족 모든 책을 읽어치웠다. <파티마의 기적>은 엄마가 성당에서 사다 준 책이었다. 그 책이 특별히 인상깊었던 이유는 루시아(Lúcia) 때문. 신앙심이 남달랐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가시덤불로 허리를 졸라매는 고행을 했다. <파티마의 기적>에는 루시아가 어린 나이에 얼마나 그 고행을 진지하게 수행했는지가 나오고, 심지어는 삽화까지 있었다. 그런 수행을 하다가 사촌동생들과 언덕에서 성모를 본 것이다. 프란시스코와 지아신토의 이름은 잊었어도 루시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책을 읽은 당시에는 그저 순수하게, 어떤 원리로 그런 끔찍한 고행이 영성에 도움이 되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십대 후반쯤 되어 나름의 윤리관이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 이후로, 그 책 내용이 기억나면 해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스스로를 일부러 아프게 하는 것이 수행이 된단 말인가? 살다보면 자초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들이 숱하게 사람을 찾아오는데, 그것으로 모자라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내 자신에게 가한다고? 그런 행위가 어떻게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작년 가을, 명상센터에서 앉은다리 지옥(아딧타나 adhiṭṭhāna, '굳은 결심' 수행)의 뜨거운 맛을 보고나서야, '이거랑 비슷한 걸까, 지옥에 제발로 들어갔다 나와 (나는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잠시나마 무아(無我)를 체험하는 기분', 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고행이라는 개념 자체에 반감이 든다.




버스나 기차를 이래서 타는 걸까. 멍하니 푸른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동안 밀어두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제까지는 연말연시가 되면 삶에서 버릴 것들과 취할 것들을 정하여 다짐하곤 했었다.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자아상을 기준으로, 그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는 해로운 습관이나 장애요소들을 솎아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로 그런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작년에 명상센터에서 시청한 S.N. 고엔카 영상에서 '어리석은 화가의 예시'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림 실력이 뛰어난 한 화가가, 본인이 그린 아름다운 여자 그림을 바라보다가 상사병에 걸린다거나, 소스라칠만큼 실감이 나는 무서운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 때문에 공포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야기. 나 또한 여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아상을 미리 그려두고, 내가 그에 부합하지 않는 순간마다 좌절하는 것을 반복하며 살고 있었다. 그동안 정직한 사람,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는 사람, 주관과 원칙이 뚜렷한 사람, 등등, 무의식에 쌓아둔 자아상에 내가 못 미칠 때마다 괴로워해왔던 것이다.


올해는 방식을 달리 해서 생각해보자. 2023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고 나는 무엇을 했는가. 2024년은 어떻게 살게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좌측 하단이 성모발현 성당, 정면이 파티마 대성당


성삼위성당에서 발현성당까지 무릎을 꿇고 기어가며 올리는 기도는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날이 추워 그런지 많지는 않았지만, 그 긴 길을 정말 무릎을 꿇고 기어가는 분들이 계셨다. 대체로 중년-노년의 여성분들이었다. 뭘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는 걸까. 어쩌면 기복(祈福)이 아니라, 신앙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찬양의 행위인 것일까. 나는 무엇을 빌어야 할까.


나도 미국 변호사 시험을 보기 전 약 50일간 시험공부를 하면서는 매일 묵주기도를 했었다. 그땐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당시에는 시험에 떨어지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후로는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희구하는 것이 없다. 그보다, 서서히, 나의 안위를 위해 기원하는 일을 주저하게 되었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고 유능했으면, 건강했으면, 예뻤으면 좋겠지만 그런걸 기도한다고 들어줄 신이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안다. 내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내가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신은 하고 싶은대로 할 것이다. 너무 힘들고 너무 아픈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 그런 정도가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성모발현지에 찾아왔는가? 발현성당의 성모상 주위를 기면서 기도를 하는 할머니를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더 이상은 사랑을 느끼고 싶어서 성당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그보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신보다는 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더 열심히 지켜봤다. 그들이 발산하는 경건함이 내게도 전염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말라붙은 신앙심이 샘물처럼 차오르지는 못했지만, 내게 어떤 것이 필요한 지에 대한 실감은 있었다. 경외심.  

미사중인 성모발현성당

석사 논문이 인생 최대 난관이었던 때를 기억한다. 엄마가 힘들어하던 나를 위해 수녀원에 봉헌하고 나오며 수녀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 수녀님이 한 말을 전화로 내게 전해주었다. "자만해서 힘든거래. 혼자 힘으로 논문을 쓴다고 생각해서." 모든 인간의 사업이 결국 하느님이 하는 일, 이라는 대전제를 두고, 그걸 모르는 일개 인간이 혼자 다 짊어지고 있다고 착각하고선 끙끙 앓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였다.


그 후로도 줄곧, 무의식중에 모든 성취는 내가 잘 해서 얻어진 결과라는 착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 실패도 고스란히 나 혼자 맨몸으로 받아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만에. 기막히게 운 좋았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가. 분에 넘치게 좋은 사람들이 나를 돕고 응원해줬다. 이뤄낸 것, 이뤄내지 못한 것, 어느 것 하나 내가 잘나 혼자 해결해본 적이 없다. 어떤 성취도, 실패도, 그 즉시 나라는 개인의 영예나 수치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뜻대로 하소서,' 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가, 아차, 싶어 재빨리 '너무 한꺼번에 세게는 말고, 살살요,' 를 덧붙였다.


겸허하게 인생에 임하는 것. 이것이 내가 정한 2024년의 과제다.  





다섯가정을 위한 초 다섯개를 봉헌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