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Intendente역 부근과 Martim Moniz 광장
포르투에서 리스본까지는 기차를 타고 왔다. 인터넷에서 워낙 기차를 신뢰할 수 없다는 논조의 글을 많이 봤고, 파업도 꽤 자주 하는 것 같아 버스 이동을 고려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버스의 경우 짐의 무게와 크기에 까다로운 편이고, 그에 따른 추가요금도 적지 않아, 결국에는 그냥 기차를 타기로 했다. 한달 전 예매한 덕에, 2등석 가장 뒷 자리 좌석을 프로모션 가격(19.5 EUR)으로 구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 기차 칸 맨 끝 좌석은 1개 좌석이라 옆에 짐을 둘 수 있어 편리하다. 짐을 올려두는 별도의 공간이 기차 칸 사이에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리가 넉넉치 않을 수도 있고, 무거운 짐을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이 결코 수월하지는 않다.
치앙마이의 Rimping 슈퍼표 장바구니에 가득, 통째로 도둑맞거나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눈물이 나오지 않을 만한 잡동사니들을 넣었다. 남편이 가지고 온 낡은 요가매트, 포르투에서 지내는 동안 사둔 세제와 섬유유연제, 남은 파스타면까지 모조리 챙긴 것이다. 88L짜리 수트케이스 위에 장바구니를 얹었다. 몸뚱아리에는 외투 중 가장 무겁고 부피가 나가는 오버사이즈 인조가죽 무스탕을 걸쳤다. 포르투가 생각보다 추워, OYSHO에서 할인가 79.99유로를 주고 산(짐을 늘린) 것이다. 그 위에 핸드폰 등 귀중품을 넣는 작은 크로스백을 먼저 메고, 노트북 가방을 걸쳤다. 그리고는 또 백팩을 멨다. 맥시멀리즘 전파 캠페인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얼굴 없는) 홍보 모델로 나서도 되지 않을까.
상벤투(São Bento)역에서 출발 시, 대부분 캄파냐(Campanhã)에서 갈아타야 하므로, 캄파냐역까지 곧장 가는 볼트택시를 불렀다. 시간은 10분 정도, 요금은 3.5유로가 나왔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무거운 수트케이스를 들어준 기사가 고마워, 볼트 앱으로 (매우)소정의 팁을 드렸다.
캄파냐역은 소박하다. 고풍스럽고 화려하리만치 장식적인 상벤투역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의 지방 소도시 기차역과 비슷한 규모와 분위기랄까. 에스프레소 한 잔(0.85 EUR)을 사서 대기실에서 마셨다.
기차 출발시각이 2분씩 계속 지연되더니, 결국에는 15분이 지나 도착했다. 기차 플랫폼에서 내가 앉은 자리 옆 벤치에 대만에서 온 듯한 세 가족이 앉아있었는데, 젊은 부모와 대여섯살난 딸이었다. 젊은 엄마가 '제멋대로 시간이 계속 바뀌네'라며 불평을 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내심으로 동조했다. 같은 동북아 거주민으로서 품은 동질감이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참 정연한 사회에 살고 있었군요'라는 말을 마음 속에서 건넸다.
기다린 끝에 탑승한 기차는 매우 쾌적했다. 예의 대만인 가족이 나와 같은 칸 맞은 편에 앉았다.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향하면서, 두세시간 후 짐을 풀게 될 에어비앤비 숙소의 후기를 다시 한번 열어봤다. 예약할때는 못 보았던 최근 후기가 있었다. '동네가 안전하지 않다, 이주민들 소굴이다'라는 내용. 에스토니아 탈린 출신의 숙박객이 남긴 후기였다. 쳇, 자기도 외국인 여행자면서 이주민이 많다고 안전을 운운하다니, 인종차별주의자인가. 그 밖에, 꼭대기 층이라 경사진 천장에 머리를 찧는 일이 자주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는 키가 162cm에 불과하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멋졌다는 (숙소 선택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후기를 다시 읽으며 긍정적인 기대를 키웠다.
확실히 남쪽이라 그런지 리스본이 훨씬 따뜻하다. 게다가 맑은 날이다. 볼트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관리자인 Paula가 마중을 나왔다. 비록 에어비앤비를 많이 이용해보지는 못했지만, 호스트와 함께 머물지 않는 집에 숙박하면서 호스트나 관리자를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Paula는 60대쯤 되어보이는데, 키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차다.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숙소에 머무는 동안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알려주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잠그는 법을 시연해보이며, 간혹 잘 열리지 않을 경우에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면서 열쇠를 돌리라는 팁까지 알려주었다.
숙소 테이블 위에는 웰컴 와인(Azulejo 화이트 와인)과 비스킷, 미니 잼 두개(호박과 딸기), 사탕과 에스프레소 캡슐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숙소 내부가 에어비앤비의 사진보다 훨씬 낫다. 사진들은 명도를 한껏 올려 희끄무레했는데, 경험상 그런 경우 실물과 많이 달랐던지라 반신반의했던 차였다. 가구와 집기가 모두 새것처럼 깨끗했고, 뷰도 기대 이상이었다.
짐을 대충 풀고 산책을 나왔다. 숙소는 지하철 Intendente역 근처의 좁은 골목 Rua dos Anjos에 위치해 있다. 건물 대문을 나오자마자 커다란 초록색 쓰레기통 너다섯개가 있다. 각 쓰레기통은 일반쓰레기와 종이, 유리병, 캔 등으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분류가 잘 지켜지지는 않는 듯 하다. 쓰레기통 뚜껑을 열기가 귀찮았는지, 주변으로 갖은 종류의 (깨진 유리를 포함한)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고, 약간의 음식물 쓰레기 악취마저 난다.
시내인 바이샤(Baixa)와 시아두(Chiado)까지는 10분에서 15분 정도가 걸린다고 했지만, 실제 걸어보니 그것보다는 2,3분 더 걸린다. 시내로 가기 위해서는 Martim Moniz라는 광장을 지나쳐야 한다. 분명 역사가 있는 광장인 것 같아보이는데, 영 관리가 안 되어 있다. 곳곳에서 오줌과 쓰레기의 악취가 난다. 작은 연못처럼 조성되어 있는 물가에는 쓰레기들이 떠 있다. 광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대부분이 흑인이다. 그 다음이 남아시아계. 간혹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앉아서 머물기보다는 바쁘게 광장을 가로질러 간다. 마침 인터넷 여행카페에서 리스본 소매치기 경험담을 읽은지 얼마 안되었다. 구글맵 화면이 떠 있는 핸드폰을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발걸음이 경보 수준으로 빨라졌다.
포르투에도 이주민들이 꽤 있었다. 이주민들의 작은 식료품점, 이발소, 식당 같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좁은 골목들은 지나칠 때마다 정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대체로 가게의 규모는 작지만, 같은 이주민 출신의 단골 손님들이 꾸준히 드나들며 안부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성탄절이나 새해 같이 남들 다 쉬는 날에도 영업을 하는 모습에서 성실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약간의 호기심이 보였을 뿐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리스본의 이주민(및/또는 이민 N세대)들은 느낌이 좀 다르다. 평일 한낮의 광장에 (아마도 비자발적으로) 할 일없이 앉아 있는 상황이라 그럴까, 표정부터 좋지 않다. 눈을 잘못 마주쳤다가는 욕을 와장창 들어먹을까 두렵다. 간혹 그들끼리 다투는 소리도 들린다. 그들이 모여있는 구석이나 골목에서는 오줌 냄새가 나고,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먹고 살기 팍팍하니 화도 자주 나고, 그러다보면 싸움도 자주 하게 되는 것이려나. 시간과 잠, 음식이 풍요롭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에게는 충분한 위생상태와 주거환경을 유지하며 사는것일지 모른다.
치앙마이를 떠나는 날 젤 네일을 새로 받았었다. 오래 방치해 벗겨지더라도 눈에 덜 띌 것 같은, 옅은 회색빛이 도는 아이보리로 색깔을 골랐다. 그런데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보니, 이제는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는 얼룩들로 삐뚤빼뚤한 손톱이 되어버렸다. 물건 값 지불을 위해 카드를 내밀거나 다시 받을때마다, 달걀을 쥐듯 손톱을 안으로 오므리는 습관이 생겼다. 아, 이대로는 추잡해서 도저히 못 살겠다. 근처 네일샵을 검색해서 가격대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았다. 기존네일 제거가 10유로, 젤 네일이 15유로이면서, 리뷰가 많지는 않지만 대체로 호평인 Glittereti Nails을 찾아 예약했다.
Glittereti Nails가 위치한 동네는 꽤 깨끗하다. 경사진 곳이라 언덕을 올라가야 하지만, 거리에서 냄새도 안나고 쓰레기도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쯤일 것 같은데, 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연보라색 니트에 레깅스를 입은 통통한 인도계 여자가 가게 앞에 나와 서 있다. 그녀가 바로, 오늘 내 손을 단장해줄 네일 아티스트 Dimple('보조개'라는 뜻인데, 예명인가 싶다).
보조개 언니가 나의 얼룩진 아이보리색 네일을 긁어내고, 열 손가락의 큐티클을 깨끗이 정리해주었다. 손톱 강화제와 젤 네일을 번갈아 바르는 그녀의 눈빛이 세상 진지해, 약간의 경탄마저 불러일으켰다. 가게에 틀어둔 음악이 궁금해서, 이건 인도 노래니? 하고 물었다. 힌두교의 아침 기도란다. 아주 긴 기도인지, 내가 앉아있는 내내 비슷한 멜로디가 반복되었고, 손톱 칠이 완성되었을때까지도 끝이 나지 않았다.
유럽대륙까지 넘어와서, 기도를 들으며 남의 손톱에 꼼꼼히 색칠을 하고 있는 그녀가 궁금해졌다. 한두가지 질문을 던지니, 그녀가 술술, 본인의 이민역사를 소개해주었다. 그녀는 2011년에 런던으로 처음 가서 6년 반을 살았다. 그 후 아일랜드에서 2년을 지내고, 2019년, 코로나 직전에 포르투갈로 넘어왔단다. 런던과 아일랜드에서도 네일샵 사업을 했는지 묻자,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젓고는, 피자헛과 버거킹에서 일했다고 했다. 피자를 서빙하기도 하고, 버거 패티를 굽기도 했단다. 그 전에 인도에 있을때는 은행에서 일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은행 업무가 더 편안했을텐데 왜 이민을 다녔느냐, 같은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재능이 참 많네, 라고 하자, 보조개 언니가 수줍은 듯 웃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보조개는 보이지 않았지만). 코로나 때문에 힘들진 않았니, 라고 운을 띄웠는데,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녀는 덤덤하게, 그때야 모두가 힘들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럼 이게 처음으로 자기 사업을 하는 거겠다, 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는데, 자랑스러운 눈치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성취한 것인지 알고 싶어, 몇살인지 물어봐도 돼? 질문을 던졌다. 38세란다. 훨씬 젊어보이는데! 하자 젊어보이는 38세가 꺄르르 기분좋게 웃는다. 그러는 너는 몇살인데? 라고 내게 묻기에 맞춰보라고 했다. 그러자, 네일샵 구석의 의자에 앉아 종일 사업 관련 통화를 하고 있던 인도인 남자(이하 인도남)이 뜬금없이 대화에 끼어들어, 33? 이라고 선수를 쳤다. 반면 Dimple은 나를 뜯어보며, 최소 28에서 최대 32라고 추측했다. 오, 친구들 고마워. 이제 2월이면 36이 돼, 라고 했더니,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며 호들갑들을 떤다. 흠, 이래봬도 내가 불과 한두달 전 오십살 소리도 들은 사람인데.
적극적으로 나와 보조개 언니의 대화에 참여하게 된 인도남. 내 예상과 달리 보조개 언니의 연인은 아니고, 아일랜드에서 산 적이 있기는 하지만, 보조개 언니와는 포르투갈에서 만났단다. 내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 남한이라고 하지 않고 코리아, 라고만 대답했다. 그러자 남이냐 북이냐, 단골 질문을 한다. 처음부터 '사우스 코리아'라고 대답하면 편할텐데, 자꾸 습관적으로 '코리아'라고만 대답하는 내 탓이다. 장난기가 발동해 북한에서 왔다, 고 대답해봤다. 그러자 인도남이 깜짝이나 놀란다. 북한에서 온 사람 처음 봤어! 라고 유난이다. '아, 그래? 난 내가 북한 출신인게 자랑스러워, 어디 출신인지 부끄럽지 않아, '라고 짐짓 유보적인 태도를 가장해 말했다. 그러자 맘씨 좋은 보조개 언니가 '맞아, 출신에 부끄러워하면 안 되지,' 라며 위로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죄책감이 들기 시작해, 장난임을 알아차리기 바라는 마음으로, 한발 더 나갔다.
김정은이 우리 삼촌이야. 그러자 인도남이 풋, 김정은은 모든 북한 국민의 삼촌 아니겠니? 라며 내 장난을 눈치챈 듯 했다. 푸흡, 장난이야. 라고 실토하자, 세상물정에 좀 더 밝은 인도남이 그럴줄 알았다구! 라며 소리쳤다. 순진한 보조개 언니는 영문을 모르고 인도남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인도남이 재차, 쟤가 구라친거야, 설명을 해주니 그제야 보조개 언니 눈빛이 가벼워졌다.
진회색으로 깔끔해진 손톱을 보니 기분이 산뜻하다. 정작 본국에서는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네일 서비스를 포르투갈에서 다 받게 될 줄이야.
연고 없는 타지에 혈혈단신 정착한 사람. 피자헛과 버거킹, 거대자본의 세계에서 정직한 노동으로 살아남아,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매일 기도하며 갖고 있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 앞으로는 그녀가 내 마음속 '리스본 이주민'의 표본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