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iPortugal (Wines of Portugal)
며칠 전 숙소 테라스에 앉아 와인에 에끌레어를 먹으려다가, 그 장면이 너무 만족스러운 나머지 황송감사하게 느껴져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러고보니, 치앙마이에서 만난 포르투갈인이 떠올랐다. 그가 리스본 여정표를 만들어주겠다고 했었는데,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이다. 치앙마이에서 이미 지나치리만치 친절하게 많은 정보를 주려고 했던 그였기에, 무리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쓸까 걱정됐다. 그래서 따로 뭘 적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점심 먹으면서 해준 이야기로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고 했었다. 정말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바쁜가보다 싶으면서도, 내가 아는 유일한 포르투갈 사람인 그에게 <내가 리스본을 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포르투갈을 떠나면 이 순간도 함께 내게서 영영 떠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느낌에, 가능한 무형의 닻을 내려두고 싶었던 것 같다.
앙코르 왓을 보러 캄보디아를 갈 거라고 했었지. 잘 지내는지, 앙코르 왓은 어땠는지 묻고, 너네 나라 참 좋다, 짤막한 메세지를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포르투갈인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구글 닥스로 총 5일의 여정을 쓴 문서를 보내며, '너에게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한국인에게 보냈더라(웃픔),' 이라고 했다. 구글 문서를 열어보니, 리스본 시내 구역별로 가볼만한 장소와 카페, 식당들의 리스트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네가 원한다면 음식과 와인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를 소개시켜줄게'라기에 나야 너무 좋지, 라고 바로 회신했다. 포르투갈에서 지낸 지 40일이 다 되어가도록,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포르투갈 현지인은 한 명도 없어 아쉽던 차였다. 다만 이틀 뒤면 리스본을 떠나는 일정이었으므로, 시간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 성사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왓츠앱(Whatsapp)으로 연락이 닿은 리스본 거주자 (이하 "리스보닛(Lisbonite)"). 숙소가 Intendente 역 근처라고 하니, 유명한 해산물 식당 Ramiro가 지척이란다. 미국 유명 요리사 앤서니 보데인 (Anthony Bourdain)이 TV프로그램에서 다녀간 적도 있는, 인기가 매우 많은 식당이라 예약이 필수라고. 내가 먼저 식사를 하고 있으면 본인이 '오후'에 합류할 수 있을 거라며, 와인의 경우 골라야 할 리스트를 보내주면 선택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흠... 그래서 온다는건지, 안 온다는건지.
일단은 그의 조언대로 Ramiro 예약을 알아봤다. 바로 다음날이라 그런지 웹페이지의 예약 버튼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그냥 무작정 가봐야하려나... 고민을 하다, 상대방의 참석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약속에 매이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주문한 음식을 내가 다 먹지 못할 수도 있고, 왁자지껄한 식당에 태연히 혼자 앉아 새우껍질을 바지런히 까 먹을 수 있는 주변머리도 내게는 없다.
두시간쯤 그렇게 "그래서 온다는 거야 안 온다는거야?"와 "오후면 몇시?" 같은 취조 질문들을 삼켜내다, 결국은 솔직함이 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상황이나 의중을 고민하고 추측해봤자, 정답을 알 수 없다. 우선 내가 생각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자. 그런 나를 그의 입장에서 너무 공격적이라거나 부담스럽다고 느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한다면, 그에게는 핑계거리를 만들 충분한 여지가 있잖은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할테다.
그래서 돌직구를 날렸다: 1) Ramiro 예약을 알아봤는데 너무 임박해서인지 예약이 안되더라, 2) 내가 해산물을 몹시 애정하기는 하지만, 대식가는 아니라 혼자서는 많은 양을 못 먹는다, 3) 그래서 만약 네가 따로 점심에 일정이 있다면 꼭 식사를 같이 하지 않아도 된다, 4) 내게 제일 중요한 것은 현지인을 만나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네 일정만 허락한다면 간단히 커피나 와인을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자 그는 그것도 좋지, 적당한 데를 알아보고 연락할게, 라고 짧게 회신했다.
다음날, 리스보닛이 Bom dia(봉 디아, 좋은 아침)! 이라며 메세지를 보내왔다. 와인 테이스팅을 하러 가잔다. 장소는 코메르시우 광장 한켠에 위치한 Wines of Portugal (ViniPortugal), 시간은 오후 5시.
사실 하루종일 속이 좋지 않았다. 전날 밤 정어리 통조림을 넣어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잤는데, 자다 깨 토를 한 것이다. 소화가 되기 전에 잠들어 그랬는지, 와인을 너무 빨리 마셔 그랬는지, 아니면 사둔지 오래돼 다소 변색된 수프용 케일을 넣은 것이 화근이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아침에 숙소를 나설때만 하더라도 괜찮은 것 같았는데, 밖을 조금 걷다보니 계속해서 속이 메슥거렸다. 머리도 좀 아팠다.
저녁의 와인테이스팅 말고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날이었으므로 다시 집에 돌아가 쉴까, 수십번 고민했지만 일단 들어가면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을 것 같아 시내를 배회했다. 약속 장소인 코메르시우 광장 근처의 카페 Fabrica Coffee Roasters에 들어갔다. 같은 브랜드의 다른 지점에서 'No Wifi, Only Coffee'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기는 했는데,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역시나 Wifi는 없단다. 카페에 오랜 시간 앉아 일하는 사람들이 반갑지 않다는 신호다. 포르투의 카페 Combi Coffee Roasters에서도 '주말에는 노트북 사용 금지'라고 적힌 작은 팻말들이 테이블마다 놓여있었더랬다.
플랫화이트 커피(5.1 EUR)를 시켰는데 역시 맛이 좋다. 커피를 최대한 천천히 마시며 킨들로 <Never Let Me Go>를 읽었다. 한 시간쯤 지나, 오래 앉아있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몸이 으슬거리기도 해서 크라상(2.3 EUR)을 한 개 시켰다. 만든지 오래 되었는지 아주 눅눅했지만 버터향이 가득한, 첫 입은 실망스러운데 반해 우물거리다보면 맛이 괜찮게 느껴지는 크라상이었다. 한 시간쯤을 더 버티고 앉아있다가, 젊은 중국인 남녀 대여섯명이 들어온 후 십분쯤 뒤에 카페를 나왔다. 그들에게는 즐거웠을 대화로 시청각이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코메르시우 광장 앞 Tagus 강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몸이 좋지 않아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집에 돌아가 드러누울 수 있다면!
드디어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4시 50분쯤 가게로 들어가니, 손님이 아무도 없다. 맞아주는 직원조차 보이지 않아,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중년의 여성분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인데요, 하니 오늘은 예약이 없으니 아무데나 원하는 데 앉으란다. 친구가 오면 주문을 하겠다 하니 그러란다. 직원 분은 본인에게 사사건건 확인을 받으려 하는 내가 조금은 귀찮은 듯 보였다. 매장 내에는 와인 디스펜서가 총 4대 있었다. 카드를 꽂고 와인을 선택한 후, 좁고 기다란 관에 잔을 갖다대면 와인이 쪼르르 나오는 시스템.
리스보닛은 5분 늦게 도착했다. 풍채가 좋고 인상이 서글서글한 사오십대 남자다. 서로를 다시 한번 소개한 뒤, 그가 이 곳 ViniPortugal(Wines of Portugal)은 포르투갈 정부에서 와인을 홍보하기 위해 운영하는 가게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네이티브의 위엄을 뽐내며, 직원 분과 물흐르듯 막힘없는 포르투갈어로 유쾌하게 대화를 나눈 후, 디스펜서용 카드를 한장 받아왔다. 직원 분, 말 많은 분이었네...?
한 잔, 많으면 두 잔 정도를 마시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네 잔이나 마셨다. 시음용이라기에는 상당히 넉넉한 양(아마 150ml)이 나오는데, 가격이 잔당 1.5에서 3.5유로밖에 안 된다. 디스펜싱 머신을 사용해서 그런지 와인이 굉장히 신선하다.
처음으로 마신 것은 로제와인. Esporão의 Assobio Douro Rosé (2022)다. 달지 않고 향긋해 산뜻하게 마시기 좋다. 반쯤 마셨을때 다른 것도 시음을 해보자고 하기에 급하게 다 마시려 했더니 리스보닛이 버킷을 받아왔다.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니 따라버리잔다. 아깝지만 전문가가 하자는대로 한다. 그 다음은 화이트와인. Quinta D'Amares의 Vinesa Alvarinho였다. Alvarinho라는 포도품종을 사용한 것으로, 파인애플이 연상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달아 답답한 향이나 맛은 없이 깔끔해서 정말 맛있게 마셨다.
세번째는 2022년산 Negra Mole. 병에 라벨이 붙어있지 않고 와이너리도 쓰여있지 않다. Negra Mole은 포도품종 이름인데, 주로 마데이라 지역에서 재배되어, 마데이라 와인 생산에 쓰인다고. 마셔보니 살짝 달콤하면서 라즈베리향이 난다. 역시 어디하나 과한 데 없이 맛있다. 마지막은 Casa das Torres의 Consensual Premium 2019. 복합적이면서도 균형잡힌 맛 같은데, Negra Mole의 베리 잔향이 남아 그런지 각각의 향을 분간하기 조금 어렵다. 마지막 와인이라 남김없이 마셨다.
와인을 시음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리스보닛에게는 열다섯살난 아들이 있다. 아내와는 같이 살고 있지 않는지, 한번도 언급하지 않아 묻지 않았다. 아시아라고는 십수년 전에 홍콩과 마카오를 가 본것이 전부란다.
"마카오에서 에그타르트 먹어봤어?" 물었더니 참 이상한 질문을 한다는 표정으로, "여행을 가서는 현지 음식을 먹어야지, 에그타르트는 포르투갈에 많잖아." 라고 답했다. 하기야, 나도 뉴욕에서 파는 김치찌개맛을 궁금해하는 남편이 의아했었으니까.
파티마를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세 목동 루시아, 프란시스코와 지아신토의 포르투갈어 발음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한국 블로그마다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아친토라고 쓴 것을 꽤 보았기 때문에 헷갈려서 정확히 알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리스보닛은 포르투갈어가 스페인어와는 달리 C를 (ㅊ이 아닌) 'ㅅ'으로 발음하고, J는 (ㅎ이 아닌) 'ㅈ'으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왜 이리 나이스해? 라고 물으니 몹시 현실적인 대답을 한다. "나라가 작아서 살아남으려면 개방적일 수 밖에 없으니까." 어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찾아보니, 국토면적으로는 대한민국이 포르투갈보다 조금 더 크고, 인구가 포르투갈의 5배나 된다. "작은 나라는 무슨, 세계 여기저기를 다 식민지화하고 다닌 열강이면서", 눈을 흘기며 농을 던졌다.
주제가 종횡무진하는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오후 7시, Wines of Portugal (ViniPortugal)의 영업마감 시간이다. "너는 손님인데 당연히 내가 내야지." 리스보닛이 흔쾌히 두 명의 와인 값을 치르며 말했다.
숙소 근처까지 리스보닛과 함께 걸어갔다. 숙소가 Intendente 역 근처라고 했더니, 리스보닛이 Intendente 역에서 본인 집까지는 걸어서 30분이면 되니, 나를 보내고 쭉 더 걸어가겠다고 한 것이다. 나야 환영이지!
시내를 걸으면서는 리스보닛이 유명한 와인샵 Garrafeira Nacional을 소개시켜주었다. 와이너리와 와인의 종류, 빈티지까지 정말 다양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Martim Moniz 광장 근처에 다다르자, 리스보닛은 본인이 자주 가는 중국식당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요포몐 (油泼面, yóu pō miàn, 뜨거운 기름을 부어먹는 면) 사진을 가리키며 맛이 아주 좋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혹시라도 배가 고프면 알려달라면서. '나는 아직도 속이 좋지 않아서...' 라고 대답하니, 그가 지금 먹자는 건 아니고 그냥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에 와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사실 그는 이때 배가 고팠던 것 같다.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또 금세 집에 도착했다.
서울에 놀러오면 나와 내 남편이(본인의 동의를 득하지는 못했지만)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하자, 리스보닛의 눈동자에 아련함이 서렸다. 진심을 담아, 그를 향해 Muito obrigada(정말 고마워)를 서너번 거듭 외치고 손을 흔들었다.
리스보닛과의 만남까지, 나와 만날 시간을 내 달라고 이야기할, 개복치로서는 공전의 용기가 필요했다. 메스꺼움과 미지근한 두통의 게릴라전에서는, 집으로 도망가지 않고 버티는 인내심을 동원해야 했다. 그로써 얻은 결과는 세 시간의 신나는 대화. 이번 여행 최고의 가성비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