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근교 신트라(Sintra)와 호카곶(Cabo da Roca)
리스본의 마지막 주, "대체로"와 같은 유보적 수식 없이 확신의 "맑음"이 예보된 날은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 뿐이었다. 관광명소는 가능하면 사람이 적은 때, 보다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을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새파란 하늘 배경을 포기할 수는 없지. 토요일에 리스본 근교 신트라(Sintra)와 호카곶(Cabo da Roca)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래도 좀 일찍 가면 낫지 않을까. 8시경 출발을 목표로, 호시우(Rossio) 기차역까지 걸어갔다. 신트라 원데이 패스(하루 무제한 이용권)을 묻자 젊은 여직원이 그런 것은 팔지 않는다며 약간의 짜증을 냈다. 신트라 시내에서의 버스 이동까지 포함되는 이용권을 기차역에서 샀다는 블로그 포스트를 봤던 터라 물은 것이었는데.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안(못) 사길 잘했다. 신트라 원데이 패스로는 신트라에서 호카곶까지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처럼 신트라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두 군데만 둘러보고 호카곶으로 넘어갈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지출이었다.
왕복 표를 끊고 영수증을 받았는데, 영수증에 비바 비아젬(viva viagem) 카드 값(0.5 EUR)이 포함되어 있다. 왕복 표라고 받은 카드는 왕복 운임을 포함한 비바 비아젬 카드. 이 '비바 비아젬 카드'는 기존에 지하철역에서 구매한 비바 비아젬 카드와 재질, 색깔, 디자인 모두 완벽하게 똑같이 생겼다. 가지고 있던 비바 비아젬 카드를 내밀며, "이거 있었는데요...?" 묻자, 직원이 언성을 높여 "그건 지하철만 되는거예요!"라고 한다. 이렇게 완전히 똑같이 생긴 충전식 카드라면 굳이 용도 구분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종이만 낭비하고 말야.
거의 10분 간격인 기차 시간표를 (역시 블로그에서) 봤던지라, 다음 기차는 몇시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 카드를 찍고 역 안으로 들어갔다. 와 있는 기차는 한 대 뿐. 그런데 기차 앞 전광판의 정차 역 목록에서 "신트라"를 찾아볼 수 없다. 일단 타보자. 잠시 엉덩이를 댔다가, 아무래도 불안해 앞에 앉아있는 청년에게 이 기차가 신트라행이 맞는지를 물었다. 젊은이는 활짝 웃으며 슬픈 소식을 전해준다. 아니란다. 나아가, 친절하게도, 신트라행 기차는 9시 5분이예요, 라고까지 알려준다.
화들짝 놀라 기차에서 내렸다. 현재 시각은 8시 15분. 50분이나 기차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명색이 기차역인데, 어디 앉아 쉴만한 데가 있겠지... 역 안을 샅샅이 눈으로 헤집어봐도, 의자 한 개가 없다. 그제야, 역 안에 들어와 서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리석고 어리석다.
종아리와 허리를 두들기며 서 있자니, 다행히도 8시 40분쯤 되었을때 신트라행 기차가 들어왔다. 기차 좌석에 앉아 검색을 좀 더 해보니, 평일과 주말은 기차시간이 다르단다.
그렇게 앉아 있으려니 어느덧 출발시각. 자리가 꽤 찼다. 창 밖으로, 역시나 겨울의 황량함과는 거리가 먼, 그저 태연한 풍경이 이어졌다.
신트라역까지는 40분 정도 걸렸다. 역 앞으로 나오니, 정차해 있는 시내 버스 뒤로 길다란 관광객 줄이 늘어져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일일권을 15유로에 사고 있었는데, 일회권은 4.1유로라고 했다. 그런데 페나성(Palácio Nacional da Pena)까지 볼트택시로 얼마가 나오는지 알아보니 고작 6유로. 그렇다면 택시다.
택시를 타고 페나성까지 올라가는 길은 몹시 가파르고 구불구불했다. 구글맵이 도보로 53분이라고 알려줘서, 한 시간도 안 걸린다면 걸어도 되지 않을까, 일이초간 생각했던 스스로가 가소로울 따름이다. 페나성 티켓은 온라인으로 구매하면 15% 할인이 되는데, 시간대를 지정해야 해서 불편하다는 말을 (이번에도 또 블로그에서) 보고 구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 구매를 하려고 보니, 키오스크에서도, 유인 카운터에서도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 요즘같이 비수기라 매진 걱정까지는 안해도 된다면, 페나성으로 이동하는 중 버스나 택시 안에서 모바일로 구매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겠다. 매표 카운터에서 공원 및 궁전을 10시반에 입장하는 티켓을 20유로에 구매했다.
페나성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동화책 삽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랄까. 고글을 쓰고 VR (Virtual Reality, 가상현실) 체험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샛노랗고 동그란 지붕 너머 청명한 하늘이란! 드라세나의 길쭉길쭉한 초록잎까지 시선을 위로, 위로 잡아당긴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 고가구와 장식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포르투의 슈퍼 Continente에서 남편과 장을 볼 때, 우리에게 다가와 한국 쌀같은 쌀은 어디서 사냐고 묻던 아주머니. 남편이 먼저 가고 난 후, 동 루이스 다리에서도 마주쳤었다. 리스본에 온 둘째날, Martim Moniz에서 다시 만났을때는 더욱 반가웠다. 그리고 이제 신트라에서까지 만나다니! 오늘은 빨간 울자켓에 빨간 니트모자를 쓴, 따숩고도 강렬한 옷차림이시다.
아주머니와 궁전 안을 함께 걸으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제는 오비두스로 근교여행을 다녀왔고, 다음주에는 마드리드로 이동할 계획이란다. 고등학교때 친구들이 함께 여행하는데, 후배가 계획을 촘촘히도 잘 짜둬, 구석구석 재미있게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시라고. 나도 이제는 포르투갈을 떠나 파리로 이동하며, 파리에서는 사흘만 있다가 귀국한다고 말씀드렸다. 남편이 포르투에 왔다 간 후로는 혼자 여행 중이라고 하니, 조금 놀라시며 안전 조심하라는 당부를 거듭하셨다.
그렇게 함께 궁전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오니 또 다른 풍경이다. 나는 넋을 놓고 보는데, 아주머니가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랑 똑같네. 오히려 우리나라 와서 배워가야겠구먼, 입장료가 왜 이리 비싸?" 라고 하셔서 피식 웃음이 났다. 또한 맞는 말씀이시기는 하다. 조금은 통쾌한 마음도 든다. "하하. 입장료가 진짜 비싸죠."
아주머니는 친구 일행분들을 만나 사진을 찍다가 먼저 떠나시고, 나는 좀 더 자연농원을 구경했다.
또 이 방 저 방을 구경하다가 내려오니 테라스와 카페테리아가 있어, 에스프레소를 한 잔 사 마셨다. 직사광선으로 얼굴이 뜨겁게 달구어졌지만, 기분좋게 맞는 자외선은 피부건강에 좋을 것만 같아(?) 아랑곳하지 않았다.
페나성에서 헤갈레이라 별장(Quinta da Regaleira)까지도 볼트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잘 잡히지 않았다.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페나성이 가장 높아, 다른 어디를 간다 하더라도 내려가기만 하면 되어 어렵지는 않다고 들었기 때문. 걸어서 40분 정도 걸렸다. 중간에 트레킹 코스(Villa Sassetti)가 끼어 있어, 산세가 험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나의 플레어스커트+앵클부츠 차림이 약간은 정신 나간 듯한 인상을 풍기지는 않을까(응, 풍겨) 좀 신경쓰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고요한 산길을 걸으니 몹시 상쾌했다.
전반적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보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저분들 코스를 잘못 짜셨네, 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에는 그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어쩌면 '트레킹이라면 역시 오르막길이지!' 라고 도전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일지도. 사람이 없는 구간에서 고프로 카메라를 켠 채 이런 말을 혼자 주절거리다가, "그래도 나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좋아요." 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이거, 뱉어놓고 보니 기분 좋은 말이 아니었다. '내리막길'이 메타포로 쓰여지는 갖가지 상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 정정할게요. 이왕이면 오르막길이 좋겠습니다. 택시 타고 가는 오르막길요.
드디어 도착한 헤갈레이라 별장. 사실 신트라에 오기 전에는 페나성만 보면 됐지, 별장까지 봐야하나? 별장이 별장이지 별 거 있을라구, 했다. 이것이 바로 호기심과 게으름을 고루 가진 자의 딜레마인데, 호기심 덕분에 비행기는 탔어도, 게으름 때문에 기차나 버스를 한번 더 타는 것은 귀찮은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이건 신트라 동화책 제2권이다. 제1권(페나성)이 신비롭기는 하지만 좀 더 밝고 희망찬 이야기였다면, 제2권(헤갈레이라 별장)은 보다 은밀하면서 신화적인 이야기다. 흐린 날 왔더니 으스스하더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특히 *입회우물(Poço Iniciáticon, Initiation Well)은 별장내 영묘한 분위기의 정점이다. (*'입회우물'은 이름의 유래를 찾아보고 직접 번역한 것이라, 더 알맞은 번역이 있을 수 있음) "입회우물(Poço Iniciáticon, Initiation Well)"이란 이름도 건축주가 직접 붙인 것이 아니라, 후일 정부가 매입한 이후 우물의 용도를 추측하여 붙인 것이란다. 말이 우물이지, 수원(水源)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고 한다. 층계의 수, 바닥의 문양 등을 근거로 어떤 의식 (특히 종교/오컬트 입회식)에 쓰여졌을 거라고 보고 있는데, 정설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별장 바로 앞 정류장에서 1253번 버스를 탔다. 현금으로 2.6유로 요금을 내고 기사로부터 표를 구매했다. 10유로를 냈더니, 잔돈이 부족했는지 20센트짜리를 한웅큼 줘서, 지갑이 세상 볼록해졌다.
일반버스보다 약간 작은 듯한 버스다. 안에는 이미 꽤 사람들이 타고 있는데, 일본인 4인 가족이 눈에 띈다. 미취학 아동인듯한 아이 둘과 부부. 유모차도 함께 탑승했다. 볼트택시가 꽤 싼데, 4인이면 택시가 더 싸지 않을까? 잠시 의문을 가졌는데, 생각해보니 미취학 아동은 버스 요금을 안 받을테니 버스가 더 싸겠구나 싶다. 내 바로 뒷좌석에는 커다란 안경을 낀 중국인 여자가 앉았다. 연령을 종잡을 수 없는 외모. 방금 쪄내 따끈한 떡처럼 새하얗고 티없는 얼굴에 곱슬머리까지, 외양이 청소년스러운 구석이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감에 가득찬 눈빛과 무신경한 옷차림이 연륜있는 중년 여성 같아보이기도 한다. 내가 핸드폰과 고프로를 번갈아 들어가며 창 밖을 찍어대자, 본인도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푸르고 너른 들판을 끼고 있는 아기자기한 집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차역에서 매슈 아저씨를 만나 마차를 타고 초록지붕집으로 향하던 길, 풍경에 넋을 잃은 빨강머리 앤이 된 것 같다.
호카곶은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제주도 어딘가의 오름인 것만 같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프라두의 격정적인 여행의 목적지이기도 했고, 오랫동안 '세상의 끝'이라 여겨지던 땅을 직접 밟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간 것이었는데. 뭔가 색다른 감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제주도를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이정표 앞에서 사진은 찍어야겠다. 이번 여행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해봤다. 이정표 사진 줄, 내 바로 앞 순서가 한국인 중년 부부셨는데, 아저씨가 바닥에 거의 드러눕다시피하며 온 몸을 던져 아내 분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서양인 중년 부부가 줄에 끼어들어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자, 아저씨가 최대한 몸을 낮추기는 하지만 눕지는 않으시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찍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역시. 아저씨는 바닥에 눕지 않으면서도 나를 10등신에 가깝도록 사진을 찍어주셨다. 빨간색 등대가 함께 나오면 좋겠다며 감각을 발휘하시더니, 이정표의 꼭대기는 잘렸다. 잘 나왔는지 확인해보라는 아저씨의 말에, 태어나서 찍은 사진 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이라도 되는 듯이 감사인사를 드렸다.
아저씨가 내 사진을 찍어주시는 동안, 아까 내 뒷자리에 타고 있던 중국 여자가 이정표 사진을 찍었다. 호카곶에서 그녀와 막 만난 듯한 중국 남자가 그녀에게 "지금 찍으면 저 사람도 같이 나올텐데?"라고 하니 여자가 멋쩍게 웃으며 "그냥 이대로 찍으려고"라고 대답했다.
한국인 아저씨로부터 핸드폰을 받아들고 중국인 여자 앞을 지나치는데, 여자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여자애, 중국인인줄 알았는데 한국인인가봐."라고 한다. 여느때 같으면 모른체 하고 지나쳤을테지만, 그녀가 나를 (저 아줌마, 또는 여자가 아닌) "여자애(妹子, mèizi)"라고 가리킨 것이 기분 좋았던 것 같다. (ㅎ) 발걸음을 멈춰 굳이 말을 걸었다. "한국인인데, 중국어는 해." 그러자 중국인 남녀가 귀신을 본 듯 놀란다.
중국에서 오래 산 적이 있어 중국어를 한다고 알려주고, 너희는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둘은 아일랜드에서 유학을 하다 막 졸업했으며, 일행에는 한 명이 더 있단다. 함께 움직일때도 있지만, 따로 움직였다가 이렇게 한 장소에서 모이기도 한다고. 오늘이 포르투갈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이따 더블린행 비행기를 탈거란다. 남자는 중국 션양(沈阳) 출신에 머리가 덥수룩하고 두꺼운 안경을 꼈다. 어떻게 중국어를 이렇게 잘 하냐며, 한국인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칭찬을 이어가자, 이내 나는 자리를 모면하고 싶어졌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한국인인지 아주 잘 알만큼 실력의 밑천이 드러날텐데. 나는 난생 처음 본 두 사람의 환상을 그대로 지켜주고 싶었다. 세상의 끝에서 만난, 중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한국인으로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서둘러 핸드폰으로 신트라 기차역 행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출발시간이 3분밖에 남지 않았다며 급히 작별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떴다.
버스 안에서 아까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내 눈에도 내가 중국인 같아보이기는 한다. 특히 자주색 스타킹...(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