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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Feb 08. 2024

걷기만 하네 / 3호선 버터플라이

조용한 발견

파리에서는 정말 많이 걸었다. 첫날은 2만 8천, 둘째날은 3만 5천, 마지막날은 2만 6천보.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걷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사전지식에 기반한 구체적인 목적지와 일정이 전무했으므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곳을 찾아가고 힘들면 카페나 식당에 가서 앉아 쉬다가, 다시 걸었다. 그러다가 걷는 것이 내키지 않거나 피곤해질 즈음, 지하철 1회 이용권을 구매해 이동했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나가다보면 재생되는 배경음악이 있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 <걷기만 하네>. 20년도 더 전에 방영된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의 OST다. 가사가 온전히 다 기억나지는 않고, 늘 처음 두 소절 “걷, 기만 하- 네-, 환, 한 가-로-등 / 나는 니 곁-에서, 널 따라가-”의 “걷기만 하네”와 “널 따라가”가 머릿속에서 반복재생되고는 한다. 그러다 문득 치고 나오는 소절이 있다. “내, 가, 조, 금, 엉-뚱-하-니——?”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걷기만 하는 나를 그저 따라가는 나. 멈추지 않고 걷는 나도 어딘가 이상하지만 그런 나를 무지성으로 따라가는 나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 그런데 그래봐야 “조금 엉뚱”하냐고 물어볼 뿐이라면, 그 정도는 괜찮은거 아닌가 싶다. 오히려 귀여운 데가 있는지도.




첫날은 센강을 따라 노트르담 성당, 오르세 미술관, 에펠탑(이 정면으로 보이는 샤요 궁, Palace de Chaillot)과 개선문을 갔다가 식당에 들러 오리 콩피를 사 먹었다. 십수년 전의 첫 여행에서 관람하지 못한 오르세 미술관을 가볼까 싶었지만, 입구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들어가고 싶지 않아져 단념하고, 에펠탑 방향으로 더 걸었다.


에펠탑이 배경에 펼쳐진 샤요 궁 앞 광장, 한국 청소년들이 태권도 시범을 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열성으로 구경한 이들은 소풍 나온 프랑스 어린이들. 형광색 조끼를 입은 어린이들은 짧은 다리로 발차기를 흉내내며, 우렁찬데 그 누구도 위협하지 못할 것 같은 기합을 넣었다. 숙소로 가는 길, 슈퍼에 들러 생수, 요거트, 자몽, 샤블리 프리미에 크뤼를 샀다. 프리미에 크뤼가 21유로라니!

에펠탑 배경의 ‘12기 대한민국 청소년 태권도 시범단’ @Palace de Chaillot
좌: 약간 짰지만 머스타드와 마요네즈를 곁들여 감자 위에 얹어먹으니 맛있었던 오리 콩피. 우: 말(해)모(해) 샤블리 프리미에 크뤼. 와인잔을 빌리기 귀찮아 유리잔에 마셨다.

  


둘째날은 바스티유 시장에서 석화를 사 먹고, 근처 카페 Viahe Caphe에 들러 카푸치노를 마시고 몽마르뜨 언덕에 갔다. 헤푸블리크(République)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선 베이커리를 발견해서 연어 키쉬와 커다란 사블레 쿠키를 샀다. 헤푸블리크에 도착해서는 카페 Fringe에서 초콜렛 차이를 한 잔 마시며 쉬었다. 그리고 생제르망으로 가는 길에는 루브르 박물관 앞에 멈춰 유리 피라미드도 구경했다. 뷰티 브랜드 오피신 유니버셀 불리(Officine Universelle Buly) 가게를 구경만 하려다가 전혀 계획에 없던 향수를 구매했다. 깨끗하면서도 촉촉한 오이향이 나는 ‘콩콩브르’ (Concombre, 150 EUR).


좀 더 걷다보니 그 유명하다는 카페 레 뒤 마고(Les Deux Magots)가 나와 들어가봤다. 샤블리 한 잔(13.5 EUR)을 주문하니, 큐민을 넣어 절인 듯한 올리브와 (문구점에 팔던 ’밭두렁‘ 재질) 옥수수과자를 줬다. 서버 분이 매우 몹시 다정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이 분도 나의 ‘먀흑씨’(merci, 감사합니다) 발음에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귀갓길, 아담한 와인가게가 눈에 띄어 정말 구경만 하러 들어갔는데 점원이 무지막지하게 친절했다. 나의 취향을 자세히 묻고, 이런저런 와인을 소개해주다가, ’그런데 제가 (비슷한 가격대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라는 도입부로 소개해준 와인은 사지 않을 수 없었다. ‘Les Sorcières’ (마녀)라는 이름의 레드와인으로, 18유로에 구매했다. 전날 마시던 와인이 반병 남아 있어, 호스트 가족과 함께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산 것이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보니, 딸네가 놀러온 듯 해서 와인을 함께 마시자는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결국, 짐가방에 꾸역꾸역 쑤셔넣어 한국까지 가지고 왔다. 남편과 함께 마셔보니, 자상하고 잘생긴 점원 말대로 균형이 정말 훌륭한 와인이었다.

좌: 바스티유 시장의 해산물가게 thalassa tradition. 삼촌이 직접 수확한 해산물을 미모의 조카가 판매한다. 우: 카페 Fringe. 분위기와 음료 맛 모두 훌륭!


카페 레 뒤 마고에서 사 마신 샤블리 한잔 (13 EUR), 올리브와 밭두렁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날. 아침일찍 나와 숙소 근처에 열린 금요시장을 구경했다. 또 다른 시장을 보고 싶어져 Place d’Italie 근처의 Aguste-Blanqui 시장까지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비가 계속 내려서인지, 연일 무리해서 걸었기 때문인지 어디든 들어가 앉아 좀 쉬고 싶었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결국 시장에 거의 다 와서야 가고 싶은 카페 (Café Jules)를 찾았다. 그동안 먹어보고 싶던 식사 크레페를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양이 너무 많아 절반쯤 먹었을때 그만 먹고 싶었지만, 남겼다가는 후회로 남을 것 같아 열심히 먹었다.

Café Jules의 메밀 크레페 ’Emma’. 쥬키니와 가지, 부라타 치즈와 (직접 만든 듯 굉장히 신선한) 바질페스토, 그라나파다노 치즈가 올라간다.


이제 뭐 하지? 남편의 카드지갑 로고가 벗겨진 것이 생각났다. 실은 거리에서 숱하게 본, 흰색의 빳빳한 종이백들을 떠올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파리에 왔는데, 너도 라파예트 백화점 한번 가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낯선 내가 말을 걸어왔다.


공교롭게도 내가 들어간 백화점 건물에서는 여자 물건만 판단다. 온 김에 구경이라도… 하다가 내 카드지갑을 사버렸다. 낮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남성용 제품을 판매하는 건물은 훨씬 한산하다. 점원에게 남편 선물인데, 당신 눈에는 둘 중에 어떤게 나은가요, 라고 물어보니 한 가지를 골라주었다가, 좀 더 좋아할 만한 것이 있다며 창고에서 새로운 상품을 가져다 보여주었다. 과연 이게 가장 좋네요, 했더니 흐뭇하게 웃는다. 그러고선 달랑 카드지갑 하나 산 나를 위해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커다란 쇼핑백에 담아주고, 세금환급 서류 카운터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으며, 세금환급 서류 업무 직원에게 잘 부탁한다는 듯 두세마디까지 건네고서야 매장으로 돌아갔다. 이 점원 분은 드라마 <마이네임>을 재밌게 봤다는데… 고마워요, 넷플릭스 코리아와 한소희 배우님.  




더럽고 냄새나는 것으로 기억했던 파리의 거리는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십사년 전 가게에 들어선 나를 본체만체 했던 점원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눈만 마주쳐도 봉쥬! 하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았다. 헤푸블리크 근처 카페 Fringe의 바리스타에게서 소개받은 *Rue Moret를 찾아가기 위해 행인 두 사람에게 각자 길을 물었었다. 그들은 내 엉터리 프랑스어 발음 때문에 알아듣지 못한 것 뿐이었는데, 난처한 얼굴로 어딘지 모르겠다며,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Rue Moret: 바리스타로부터 들은 ”루 모허“라는 지명만으로 찾아다녔다. 갤러리와 공방, 소품샵들이 많은 곳. 집에 돌아와 호스트에게 물어보니, Rue Moret 거리만이 아니라 그 부근 지역을 Rue Moret라 통칭한다고. 


노트르담 성당과 몽마르뜨 언덕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개선문은 기억보다 작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에너지가 고갈되어버린다고 생각해왔는데, 푼수처럼 웃음을 터뜨리게 해주는 사람들만한 확실한 강장제가 없다는 것을 여행내내 체험했다. 백수 신분에 맞게, 쓸데없는 돈은 일절 쓰지 않는 검소한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했으나, 막판에 소심한 명품쇼핑을 했다.


조금은 요란한 깨달음을 얻어가는 여행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그저 반 박자씩 늘려 천천히 걸었을 뿐이다. 기억과 예상을 빗겨가는 실제를 확인하며, 사소하고 조용한 발견들을 수집해 왔다. 오르세 미술관 입구까지 걸어가놓고, ‘사람이 너무 많아,’ 라며 뒤돌아서는 변덕을 부려도, 그런 내가 그냥 조금 엉뚱할 뿐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순조로운 여행이 되었다. 잔뜩 내키는대로 걷기만 했던 여행. 마음껏 걷고 생각하며 구경하고 돌아오니, 전보다는 조금 더 나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 35세에 떠나 포르투갈에서 겨울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곧 나의 생일이 되었다. 얄궂게도 음력 설과 겹쳐, 시가에서 *시모가 끓여주신 미역국을 먹으며 조용히 생일을 맞았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며느리가 대기업 사내변호사인줄로 알고 계신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재고의 여지 없이 청년이 아닌 만 36세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세상이 뭐라한들, 나는 나에게 좀 더 관대해지려고 한다. 이제 청년이 아니니 '중년'다워야 한다는 나의 엄격한 마음이, 아직 조금 엉뚱하면서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의 불안한 마음을 가끔씩은 품어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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