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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Feb 06. 2024

봉(ㅈ)ㅎㅠㅎ (Bonjour)!

투머치토커 파리지앵 호스트 할아버지

리스본에서 파리까지는 새벽비행기로 이동했다. 보안검색 등 수속에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 그래서 3시간 전 공항도착도 생각보다 여유롭지는 않았다, 하는 후기를 봤던지라, 일찍 숙소를 나서기로 했다. 비행기 이륙시간은 5시 35분인데, 2시에 출발하는 택시를 예약해두었다. 택시가 잡히지 않을까 염려해 미리 예약을 한 것인데,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가격이 비싸다 (16 EUR) 했더니, 무려 벤츠께서 오셨다. 마침 프랑스 혼혈이라는 기사분은 내가 파리에 간다니, 파리 부심을 한껏 드러내며 파리의 멋진 레스토랑과 카페를 그리워했다. 내 비행기 이륙시간을 듣고는, 뭘 세시간씩이나 미리 가 있느냐며 나를 촌놈 취급하는 눈치였다. 인삿말과 감사표현 등, 간단한 프랑스어 특훈도 받았다. 


에어프랑스 카운터에서 수속을 기다리는데, 항공사 직원이 대기중인 승객들의 짐을 살피며 오늘 비행기가 만석이니, 작은 짐은 모두 앞 좌석 밑에 넣으란다. 볼록하게 메고 있던 내 백팩에도 빨간 스티커를 붙이면서 좌석 밑에 넣으라기에, 나는 랩탑 가방도 함께 넣어야 해서 좌석 밑 공간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고 하니, 흘끗 곁눈질 하고서는 괜찮을 것이라며 무성의하게 내 우려를 일축해버린다. 드디어 체크인 수속을 하면서, 카운터의 직원에게 다시 한번 읍소를 해 봤다. 젊고 잘생긴 카운터 직원이 백팩을 무료로 추가 위탁해줄 수 있는데 원하냐고 물었다. 냉큼, 고맙다고 말하며 제안을 덥석 물었다. 백팩에는 부피대비 무게와 가격이 덜 나가는 물건들만 정리해 넣었기 때문! 나의 보라색 나일론 백팩, 일명 '약초가방' (할머니가 뒷산에 약초를 캐러갈때 드는 가방같다며 남편이 붙인 이름)을 잽싸게 건넸다. 

 

리스본 공항은 예상했던 것보다 깨끗하고 예뻤다. 웬만한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지만, 커피와 페스츄리, 샌드위치와 맥주까지, 요깃거리를 파는 곳이 꽤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커피를 한 잔 사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비행기에서나마 자야했으므로 꾹 참았다. 


두시간 반의 비행시간, 꾸벅 졸고 잠을 깨니 승무원들이 커피와 쿠키를 나눠준다. 커피를 마시며 아이패드로 넷플릭스에 다운받아둔 영화 <키친>을 봤다. 주인공의 무심한 눈빛연기와, 드라마틱한 배경설정과는 대조적으로 전개가 차분하고 담백한 것이 아주 재미있었다.  

커피는 인스턴트 커피. 공산품 쿠키는 버터향이 진하고 많이 달지 않아 괜찮았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는 예상 도착시간보다 십여분 이른 9시 5분경 착륙했다. 위탁수하물을 기다리면서, 파리는 물가가 비싸니 택시는 엄두도 못내지, 라며 대중교통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쉽지 않아보인다. 파업 때문에 운행이 되지 않는 구간도 있는 것 같고... 가격만 한번 확인해보자며 볼트택시 앱을 열어보니, 20% 할인 쿠폰을 주겠단다. Daumesnil에 위치한 나의 에어비앤비 숙소까지 할인 후 37유로, 한화로 5만원 초반대. 쿠폰의 꼬드김에 쉽게 넘어가버렸다. 


택시앱 승차장을 찾아가 기다리고 있는데 기사가 전화해서는 횡설수설한다. 영어를 잘 못하는 건가. 게이트가 어디냐기에 택시앱 승차장내 위치를 알려주어도 게이트만 묻는다. 그래서 도착층 게이트로 다시 돌아와서, 나는 16A에 있어, 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쪽으로 오겠다고 해놓고, 다시 전화를 해서 자기가 보이지 않느냔다. 전혀! 아무런 차도 오지 않아! 두세번쯤 통화를 거듭하고, 게이트 16A와 택시앱 승차장을 오간 후에야 알아낸 것은 그가 출발층에 있다는 사실. 밀수범처럼 짐을 잔뜩 든채, 종종걸음으로 공항을 누비고 있자니, 이럴거면 택시를 내가 왜 타나 싶어 화가 치밀어오른다. 


기사에게 그냥 이 주문을 취소요청하면 안 되겠니, 라고 하자 제발 부탁인데 출발층으로 올라와줘, 부탁할게, 라며 사정을 한다. 이유를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도 통행료나 주차료같은 요금을 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출발층으로 올라가, 그가 기다리라던 게이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이삼분쯤 지나 드디어 검은색 기아 스포티지, 나의 볼트택시를 만났다. 왜 출발층으로 올라오라고 했는지를 물으니, 요금을 내야되서 그랬다고. 예상한대로다. 출발 후 목적지에 도착할때까지 줄곧 통화를 일삼고, 주행 중 문자메세지까지 보내는 그를 도무지 곱게 볼 수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기사 대기료 3유로까지 추가 결제되었다. (물론 발견 후 볼트에 이의제기를 해서 환불받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도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한다면 왕복 십만원이 넘게 들텐데. 애초에 마일리지 사용 항공편 취항지 중에 파리를 선택한 게 무엇 때문이었지? 이른바 '하녀방' (옛 시대에는 하녀들이 살던, 두세평짜리 쪽방)에 살았으면서도, 그때의 파리 생활을 잊을 수 없다던 여행작가 부부의 꿈에 젖은 얼굴 때문이었다. 궁금했다. 도대체 왜...? 십사년전 고작 사나흘 머물렀던 것이 전부였던 내게는 파리가 더럽고 불편하며 불친절한 도시로만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통째로 놓쳤던 것 아닐까? 의문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덜컹거리는 차 뒷좌석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떠드는 기사를 보고 있자니, 놓친 것은 놓친대로 두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또 감정은 감정대로 소모한 채, 졸음이 쏟아진다. 그러나 잠들면 안 될 것 같다. 




에어비앤비 숙소 체크인 시간은 오후 4시라 아직 멀었지만, 호스트가 오전에 짐을 먼저 놓고 나갈수는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호스트 할머니는 외출 중이고 할아버지가 집에서 업무를 하고 계셔서 마중을 나왔다. 프랑스인들은 언어 자부심이 강해서 인삿말 정도는 프랑스어로 해줘야 한댔지. "봉쥬!" (Bonjour,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니 할아버지 얼굴이 환해진다. 


거대한 23kg짜리 수트케이스를 할아버지와 함께 들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호스트 집은 맨 윗층. 계단 구석마다 중형 화분이 총 세 개 놓여있어, 혹시라도 내 수트케이스가 화분을 깨트리지는 않을까 간이 바싹 쪼그라들었다. 집에 간신히 들어왔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내 방은 이 집에서도 다락에 있으므로 실내에서 한 층을 더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한층 더 높고 좁은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 천장고가 낮은 쪽방에 수트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아, 이것이 내가 이틀밤을 잘 하녀방이로구나. 예쁘고 아늑하다. 그러고보니, 어린 시절에는 만화에서나 보던 이런 다락방이 로망이었다. 비스듬한 천장 아래 누워 책을 읽는 낭만을 꿈꿨더랬지. 방 옆에는 나 혼자 쓰는 다락 화장실이 있다. 안에 욕조가 있어 쾌재를 불렀지만, 아쉽게도, 밤에 씻으려고 보니 '샤워를 즐기세요! 하지만 목욕을 하고 싶은 유혹은 떨치세요, 수자원이 날로 귀해지고 있습니다.'라고 쓰여있어, 유혹을 떨쳐내야만 했다. 


이제 짐을 내려두었으므로 밖으로 나가려는데, 할아버지가 토크에 시동을 걸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겠냐고 하더니, 마시겠다니까 우선 테이블에 앉으란다. 그러고는 또 (커피를 내리러 가던 것을 까먹고) 그 자리에 선채로 한참을 이야기한다. 본인은 건축가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프로젝트를 따오기도 하고, 자기 사업도 하고 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 영화 때문이야. <기생충>? <기생충>도 좋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전에 한국 영화를 접했다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를 봤거든. 모른다고? 어떤 이야기냐면, 숲속 연못 위 오두막(암자)에 사는 남자가(노승이) 있는데... 모르겠다고? 내가 나중에 찾아서 뭔지 알려줄게." 


그러다 커피를 아직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는지 주방으로 가신다. 에어비앤비 숙박객은 주방 출입 금지라는 하우스 룰이 있으므로, 따라 들어가진 못하고 밖에서 서서 기다리며, 에티오피아 원두인가요, 향이 좋네요, 라고 했더니 온갖 원두가 다 있단다, 라며 정작 내게 내려주는 것은 무엇인지 (귀찮아서인지, 까먹어서인지) 알려주시지 않았다. 


갓 내린 에스프레소는 균형잡힌 맛이 좋았다. 감사히 받아들고 마시며 이야기를 듣는데 희한하다. 왜 저 할아버지 이야기가 재미있지? 예전에 본 조승연 작가 유튜브에서 파리지앵들은 엄청난 투머치토커라던데, 어떤건지 대충 알 것도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말을 안 하고 있기에는 생리적으로 참기 어려운 듯 보인달까. 그런데 다 재미있는 내용(마크롱의 미국 금전 수수 음모론 포함)이라, 듣는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렇게 삼사십분간의 대화가 휩쓸고 지나간 뒤, 할아버지가 (만족스런) 한숨을 내뱉고는, 자, 이제는 뭘 할 계획이니? 라고 물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어요, 그냥 시내를 좀 걸어다닐까 하구요, 라고 대답하니, 그의 눈빛이 일순 반짝인다. 


"오늘은 해가 났으니 하는 제안이야. 집 밖을 나가면 나오는 길을 그대로 쭉 걸어가다보면 센(Seine) 강이 나와. 센강의 강둑을 따라 난 산책로를 따라서 걸으면 노트르담 성당이 나오지. 한 4km 정도?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될거야. 더 가면 오르세 미술관도 나오고. 제안대로 했던 사람들은 다 만족스러워한 코스야." 


듣기만 해도 완벽한 것 같다며 감사하다고, 먀흫씨 보꾸 (merci beaucoup)!를 외쳤다. merci가 "메흐씨"보다는 "먀흫씨"에 가깝게 들리기에 들리는대로 말한 것이었는데, 내 발음에 몹시 만족한 할아버지가 좀 더 가르쳐주려 한다. 봉쥬(안녕하세요)를 해보라기에, "봉-쥬!"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아니아니, 다시, 봉(ㅈ)ㅎㅠㅎ!" 라고 하신다. 이어지는 "봉ㅎ쥬ㅎ!"에도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혀를 쓰면 안 돼. J는 잊어버려. 봉(ㅈ)ㅎㅠㅎ!" 그래도 내 발음이 시원치 않자, "괜찮아, 알아들으면 됐지 뭘." 말씀하시는데, 어째선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많이 작아졌다. 




할아버지가 알려준 센강 코스를 하염없이 걸었다. 걷다가 피곤해서 벤치에 앉아 전날 리스본에서 사온 파스테이스 드 벨렝의 에그타르트를 꺼내어 먹었다. 약초가방(백팩)에 들어가 위탁수하물로 파리까지 오느라 녹초가 된 것인지, 물에 담구었다 꺼내기라도 한 것처럼 축축하고 흐물하다. 


물에 젖은 듯한 에그타르트는 먹는 것이 힘이 들고, 졸음이 고양이 솜털처럼 눈꺼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런데 왜일까,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는 것은. 


내가 말로만 듣던 진성 투머치토커를 만날 줄이야. 파리에 오길 잘 했다. 



센 강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보니 만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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