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의 대상
자신있게, 나는 피플 플리저(People Pleaser)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향인에 에너지도 부족한, 그런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 인간관계에서 무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름의 원칙이었다. 피플 플리저들을 얕잡아봐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이겨내지 못할 일은 시도하지 않겠다는 자기방어의 노력이었다.
물론 좀 더 어렸을때는 나도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십대 후반쯤, 어느 정도 철이 들고부터 관찰을 해보니, 인간관계도 대변과 차변으로 이루어진 대차대조표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기가 클수록 상응하는 의무도 크다. 의무를 줄이면, 사랑과 인기도 줄어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일정한 판단과 그에 기한 기대가 깃들게 마련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그 사랑의 기반이 된 어떤 것이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사랑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내 계산이었다. 그러자면 가끔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한쪽을, 본인 또는 상대를 기만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대인관계에 나만큼 욕심없는 사람도 없지, 라고 자부해왔다. 에너지는 유한하니(그런 마음가짐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집중 투자하자. 일을 할때에도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이나 평가보다 '잘하는 사람'이 지향하는 바였고 듣기에 좋았다. 회사업무의 봉사 대상은 회사이므로, (사람이 아닌) 회사라는 법적실체의 이익을 최우선시한다는 원칙은 판단이 명료해 편리했다. 물론 동료간, 부서간 협업에서 효율을 높이고 관계와 조직의 항상성을 일정수준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하는 원칙과 예의는 철썩같이 지키려 했다.
그런데 퇴사 결정을 하는 시점에서야 깨달았다. 나도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구나. 당시 나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자가)진단을 내렸는데, 직전 일년의 상황을 돌이켜봤을때 업무량과 업무강도가 객관적으로 이겨내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내 정신을 소진시켰을까. 오랜시간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내 팀장과 임원을 좋아했고, 내 업무의 결과가 그들에게 미칠 영향을 지나치게 내재화하고 과대평가했다. 그런데 내게 업무를 관리받는 동료들은 나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았다. 배나 사과 주문에 똥이나 폭탄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나라는 토양에다 묻었다. 그런 후 내가 가진 것으로 최대한 배나 사과와 비슷한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내려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조직의 항상성'에 이바지하기 위해, 외부에서는 내 마당에서 똥냄새를 맡거나 폭탄연기를 볼 수 없도록 방수포로 덮어두었다. 내 팀장과 임원, 그리고 그들이 책임지는 내 조직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똥이나 폭탄을 가지고 온 사람들 손에 다시 들려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했어야 했다.
알고보니, 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정립에 아직도 서툴다. 그런 점에서 남편이 나의 어떤 특정한 면모에 크게 경탄하거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덕분에 그를 많이 사랑하고 아끼면서도,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그의 사랑을 계속 받을 수 있으리라는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정말 좋아했던 전남친에게는 (그가 좋아하는) 다소 유약하고 의존적인 여성상을 유지하려고 했었고, 여전히 사랑해 마지않는 부모에게는 앞으로도 똑똑하고 유능한 딸이고 싶은 걸 보면, 나는 사랑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상대와 내가 공히 사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나‘를 만들고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회사를 그만두고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가장 좋은 점이라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의 봉사대상에 나(그리고 가끔, 가족)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주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내 글과 영상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 있었는데, 지금은 포기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내 글과 영상을 좋아하게 하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과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그에 맞게 재단된 결과를 제공해야 한다. 회사원이 회사의 이익을 최우선시해야 한다는 나의 오랜 신념처럼, 타인에게 소비되는 것이 목적인 창작물은 소비자의 행복을 최우선시해야할 것이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집스레 나 좋은 글을 쓰고 나 좋은 영상을 만들며 누군가 좋아해주기를 바랐던 것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글과 영상에서 맡기 좋은 향이 밸 것이고, 어디선가에서 향을 맡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 당연히 그 최종 목표는 잃지 않았지만, 근미래에 달성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깨우치고 보니 너무나 명백한 현실인데, 왜 그동안 그렇게 좌절했을까.
한국으로 돌아가면 천천히 재취업을 준비해야겠다. 정말 천천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