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내가 자리해야 할 곳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는 말을 들어왔다.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등의 좀 더 따뜻한 말도 있었을 것이다.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말은 "쓸모 없는 인간"도 사실은 존재한다고 느껴지도록 하기 때문에 무섭게 들린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20대를 힘겹게 지나 온 지금,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쓸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않으려고 노력한다). 한 인간의 가치가 그가 사회에 제공 가능한 효용으로 결정지어진다면, 삶은 볼품 없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의 쓸모"라는 (자기야말로) 몹쓸 개념이 생각보다 내 영혼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나 보다. 놀기 시작한 지 한달도 안 되었는데 한두 푼 소비할라치면 벌써부터 스스로에게 "돈도 못 버는게."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내게 소득이 필요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당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퇴사를 결정했을 때, 일정기간은 수입이 없어도 주재원 시기에 모은 돈과 퇴직금을 파먹고 살면 된다, 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호기롭게 획정해둔 "여유자금"의 범위는 점차 퇴직금만으로 좁혀졌고, 오늘 새벽에는 돌연 "퇴직금의 절반을 쓰기 전에 수입원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어제 오늘은 비가 내렸으므로 요가원까지 걸어가야 했다. 따라서 출발시각은 20분 앞당긴 5:10. 도보로 35분 가량이면 걷는 것이 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시원하기도 할 테고. 어제는 정말 그랬다. 자전거를 타고는 들어갈 수 없었던 경의선 숲길을 걸으며 드디어 여기를 걸어서 가 보네, 생각했던 것이다. 빗소리도 듣기 좋았고, 요가원에 도착할 즈음 날이 밝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 새벽은 달랐다. 나가기 전부터 바람 소리가 거센 것이, 도무지 걷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갈까? 가까운 거리라 택시비가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을텐데. 평소 택시를 잘 타지 않아 얼마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어림잡아 오천원은 거뜬히 넘지 않을까.
결국은 걸어서 출발했다.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 가로등과 자동차들의 전조등, 빨간색 후미등, 그리고 초록색 가로수들이 빗물에 젖어 있는 모습과 소리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람이 불어 우산이 흔들리고 제법 큰 물웅덩이에 발이 잠기고 모래가 신발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회사를 다닐 때에도 같은 상황에서 택시 타기를 꺼리지 않았을까 싶으면서도, 찔꺽찔꺽 물웅덩이를 피해 걷는 내 꼴이 무소득자여서 더욱 초라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쯤 요가를 가지 않아도 됐을텐데. 요가원에 낸 회비를 수업 수로 나눈 1회당 가격과 택시비, 새벽 수업이 아닌 저녁 수업 (원장님이 아닌 다른 선생님이 가르치신다) 참석의 옵션을 이리저리 저울질하며 걸었다. 찔꺽찔꺽.
도착하니 45분이다. "하루쯤 가지 않는 것"을 고려했던 것이 송구스럽게도 원장님은 문을 열어주시며 "안 그래도 J가 기다릴텐데 했었어~" 하신다. 내가 일찍 온 것인데도. 게다가 수련생들도 여느 때보다 적은 편이라 자세를 더 많이 잡아주셨다. 급기야 끝나고 일어났을때는 처음으로 칭찬 비슷한 것도 들었다. 내가 가는 귀가 어두워 어떤 뜻인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환하게 웃으며 하시는 말씀이 칭찬이려니 해서 멋쩍게 손사래를 친 것이다. ("아직 스탠딩까지밖에 안 했는데 프라이머리가 거의 돼~"였는지, 하여튼 '스탠딩', '프라이머리', '돼' 등의 키워드가 들어가 있던 것은 분명하다.)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보람감이 샘솟았다. 그렇게 요가원을 나와 마치 계획이라도 했던 것처럼 자연스레 맞은편 빵집으로 들어갔다. 대로변이 아닌데도 아침 7시부터 문을 여는 부지런한 빵집이다.
만삼천원어치 빵을 샀다. 사과파이, 블루베리파이와 플레인 치아바타. 따뜻한 종이봉투에서 새 나오는 버터향은 정당한 소비의 기쁨을 느끼기에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