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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마감 시간

4:30 AM

by 스티카 Stica

새벽 4시 반의 알람. 사위가 캄캄하다. 제 아무리 한여름이라지만, 아직은 조물주도 깨기 전이다. 일어나야 되는데… 를 되뇌이며 다시 눈을 감으면, 아주 얇고 투명한 꿈의 막이 덮인다. 그러고 나서 눈을 뜰 때는 언제나 4:33에서 4:36 사이. 이제 다시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협탁 위 워치와 핸드폰을 들고 조용히 일어난다. 남편은 모로 누워 자고 있다. 드넓은 오른 편 공간은 늘 고양이들 몫이다. 어둠 속 눈동자가 빛난다. 잘 잤어?


안방에서 꽤 무거운 미닫이 중문을 열면 화장대와 화장실이 있다. 남편이 깨지 않도록 다시 조심히 닫는다. 화장대에 어색하게 놓여진 올리브 오일 병을 들어 오일풀링을 한다. 화장실을 갔다가 양치를 한다. 간밤에 자면서 땀이 나 끈적해진 목덜미를 물로 닦는다.


잴까, 말까.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체중계에 올라가 본다. 역시. 회사를 안 다니고 놀아서 그런지, 요가로 근육이 붙어 그런지 1.5킬로 정도 늘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줄지 않고 있다. 운동복으로 갈아 입으면서, 운동복도 작아진 듯한 느낌에 살짝 속이 상한다. 날씬해서 뭐 하게. 체중계를 치우고 밖으로 나온다. 둘째(고양이)도 곧 따라나오려 안에서 방문을 긁을 것이므로, 안방 문을 연 채 녀석이 나올때까지 기다린다.


물 500ml와 함께 브로멜라인과 퀘르세틴을 한 알씩 먹는다. 공복에 먹으면 체내 염증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밤에 에어컨을 켜느라 닫아두었던 앞뒤 베란다 문을 활짝 연다. 가로등이 비추는 텅 빈 차도를 건너 온 새벽 공기. 거실의 티테이블을 소파에 밀어 붙이고, 요가 매트를 편다. 인센스 스틱에 불을 붙인다. 차분한 절 냄새로 공간이 완성되었다.


TV로 요가원 원장님의 ‘아쉬탕가 요가 4주차’ 영상을 틀어둔다. 영상 속 구령을 들으며 누워 마사지볼과 폼롤러로 몸을 달래준다. 지난번에 헷갈렸던 시퀀스가 나올 차례다. 화면을 좀 더 유심히 본다. 파르브리따 트리코나사나(Parivritta Trikonasana)를 건너뛰고 우띠따 파르쉬바코나사나 (Utthita Parshvakonasana)를 해버렸었지. 오늘은 틀리지 말자.


5:30에 집을 나선다. 어느새 날이 밝은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이 맛에 일찍 일어나지. 자동차들이 듬성듬성 나타나 있긴 해도, 거리는 아직 꽤 뻥 뚫려있다. 5:50쯤 요가원 도착. 대부분은 내가 가장 일찍 도착한다. 원래 6시 정각에 수업 시작이고, 원장님이 10분 전에 문을 열어주시는데 너무 더 빨리 도착해버리면 문을 열어주실 때 (재촉한 듯 하여) 조금 죄송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가능한 50분에 맞춰 가려 한다. 텅 빈 요가원에 처음 매트를 까는 곳은 오른 쪽 뒷편 구석이다. 곧 하나 둘 매트가 추가로 깔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가 여기에서 제일 하수일 것이다. 늘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하지만, 시퀀스 진도는 내가 가장 느리다. 다행히 마이솔 (Mysore) 클래스는 프라이머리 시퀀스를 각자의 속도에 맞춰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속도를 맞출 필요가 없다. 내 호흡에 따라 한 동작씩 나아가면 된다.


수리야나마스까라 B (Surya Namaskara B, 태양경배자세)를 다섯번 다 해갈 쯤이면 땀이 온 몸을 뒤덮는다. 머리에서 내려온 땀이 눈을 지나쳐 떨어지도록 얼굴을 찡그리기도 한다. 잘 안 되는 동작은 계속 잘 안 되고, 헷갈리는 순서는 자꾸 헷갈린다. 과연 연습을 하다보면 언젠가 정석대로 이 동작을 완성하는 날이 올까? 의문스러운 마음이 오래 머무는 만큼, 머릿속 순서가 뒤엉켜버린다. 원장님이나 다른 선생님들이 땀으로 미끌미끌한 내 팔을 잡아 자세를 교정해줄 때면, 나 말고도 땀을 뿜는 사람들이 많을거야, 라며 뻔뻔해지려 노력해본다.


내가 배운 데까지 시퀀스를 끝내면 사바사나 (Savasana, 송장자세)로 쉰다. 사실 좀 더 오래 쉬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동작을 계속 하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누워 쉬는 게 쉽지는 않다. 진행되는 동작에 집중하듯 쉼에도 집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남의 눈치를 꽤나 보는 사람이다.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매트 자리를 비켜줘야만 할 것 같다. 결국에는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면 7시 10~15분 전.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에는 어느덧 차도에 자동차들이 많아져 감히 차도로 자전거를 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에는 울퉁불퉁한 블록들 때문에 엉덩이가 덜컹거린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며 페달을 밟는다.


집으로 돌아오면 7시 10분. 회사를 다닐 때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시간. 시원한 물 500ml를 한잔 더 마시고 커피 내릴 물을 끓인다. 스트레칭을 좀 더 할까, 책을 읽을까, 영어공부를 할까, 아니면 글을 좀 써볼까? 정해진 '그 다음'과 마감 시간이 없으므로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 참 평화롭네.


원래 나는 만성적인 조급증이 있으며, 무슨 일이든 조금이라도 집중을 할라치면 숨을 참는 버릇이 있다. 일할 때는 눈을 잘 깜박이지 않아 '모니터 뚫어지겠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더랬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우아한 발레리나들 세상에서 나 혼자만 힘을 빼지 못해 삐걱거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학부 때는 동기 언니가 택시 안에서 우연히 자전거 타고 집에 가는 나를 봤는데, 내가 차도 갓길에서 (그땐 겁이 없었다) 경주하는 사람처럼 몹시나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달리는 모습 때문에 아주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 줄 알고 걱정했다고 한 적도 있다.


이제 데드라인은 하나만 지켜도 된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4시반. X요일 Y시까지 송부해야 할 보고서, 의견서, 계약서는 이제 없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음 일정은 마음이 내키는 글쓰기로 골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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