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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이번 설에는 못 가요

이번에는 '나뿐'며느리 될게요

by 춤몽

몸살 3일째.

학교에서 감기를 옮아온 아들이 전달해 준 연휴 선물이다.

아들과 나는 누가 누가 더 체온이 오르나 내기하듯 서로 열이 나고 식기를 반복했다.

아들의 코에서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고, 나는 이곳저곳 쑤셔대는 몸을 겨우 일으켜 뒷수습하기 바빴다.

아이의 코피로 젖은 내복 몇 벌은 아직 빨지도 못한 채 베란다에 방치되어 있다.

다행히 3일간 꼬박 앓은 후, 둘 다 열은 떨어졌는데 기침은 여전하다.


내일이 구정 당일인데 시댁 방문은 어쩌나 하는 생각에 오늘은 아침부터 편두통까지 추가됐다.

진통제 투혼으로 갈 수야 있겠다만, 바이러스를 달고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하지도 못하겠는 상황.


결혼하고 10년 동안 매년 두 번의 명절 차례와 세 번의 제사를 거른 적 없이 참석한 터라 마음이 불편했다. 나와 아들이 아픈 걸 제일 가까이서 지켜본 남편마저 가자, 말자라는 말을 먼저 안 꺼내기에 답답한 노릇이었다. 아마도 그는 열이 어느 정도 내렸으면 마스크 끼고 가서 인사드리고 떡국 한 그릇이라도 먹고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남자인 걸 10년 넘게 같이 살아본 나는 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만히 생각할수록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항상 내 상황보다 의무와 도리를 먼저 생각하는가. 왜 항상 나를 먼저 돌보기보다 타인에게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는가. 왜 항상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외부의 인정을 받으려 애를 쓰는가.


저녁 제사에 참석하려고 직장에서의 잔무를 꽁꽁 싸 들고 하이힐을 재촉하던 내가 떠올랐다.

아기가 내일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만삭이었을 때, 부른 배를 싱크대에 붙이고 서서 20인분에 가까운 설거지를 하던 내가 떠올랐다.

아무도 내가 꼭 참석해야 한다고, 너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 없는데, 시댁 대소사나 명절이 닥치면 나 혼자 아등바등했다.


이불을 박차고 나가 남편에게 말했다.

아직 몸이 100프로 회복 못 하였으니 명절 끝나고 주말에 가자고.

지금 바로 시부모님께 연락드리자고.


"어머님, 이번 설에는 못 갈 것 같아요."


어머님은 걱정 말고 낫는 대로 오라고 하셨다.

새해 덕담도 잊지 않고 해 주셨다.

아들 내외와 손자 모두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영상 속 어머님 머리 위로 커다란 손 하트가 그려졌다.


시부모님은 원래 이렇게 좋은 분들이다.

도리를 못하면 손가락질 받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나 자신을 괴롭힌 건 바로 나다. 내 사정을 우선시하는 게 꼭 이기적인 것이 아님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전에 없던 용기를 쥐어짠 덕분에 양가 어른들의 이해를 얻었다. 그리하여 이번 연휴는 떨어진 체력을 끌어올리는 데 쓸 수 있게 됐다.


늦은 방문이 되겠지만 주말에 찾아뵈면 세배드리고 손수 떡국과 삼색 꼬치전을 흔쾌한 기분으로, 정성껏 만들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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