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이거 드시래요.”
에구구 소리를 내며 소반 앞에 털썩 앉은 할아버지 가까이로 전복죽 그릇을 밀었다.
“이놈의 여편네, 국이나 한 사발 시원하게 끓여 낼 일이지.”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된 할아버지가 미간에 세로줄을 만들며 불퉁하게 말하는 바람에 내 목이 한 뼘이나 기어들어갔다. 그런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눈꼬리를 내리고 말했다.
“예솔아, 하르방 방에 가 티비 볼커냐?”
아까부터 내심 기다렸던 말이다. 텔레비전이 할아버지 방에 있어서 내 마음대로 ‘얼음 공주의 대모험’도 못 보고 ‘꼬마 마법사 레미’도 못 봐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할아버지 요 위에 누워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코를 찌르는 냄새에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정리되지 않은 요와 이불에 고릿하고 쾨쾨한 할아버지의 체취가 빈틈없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얼음 공주의 대모험’ 본방송은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입으로만 후하후하 숨을 쉬며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잠시 후, 열린 방문 밖에서 할아버지가 가래 끓는 소리로 나를 불렀다.
“예솔아, 이리 와 보라겐. 이걸로 저 아래 생생슈퍼 가서 탁배기 네 병만 사 오라이.”
“탁배기요? 탁배기가 뭐예요?”
“주인 여자한테 대장 할망집에서 왔다고 하면 알 거다. 남은 돈으로 예솔이 과자 하나 사구.”
할아버지가 바지춤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얼음 공주를 괴롭힌 악당의 정체가 이제 곧 드러날 때가 됐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젤리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텔레비전을 끄고 발딱 일어나 생생슈퍼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줌마, 대장 할망집에서 왔는데요, 우리 할아버지가 탁배기 네 개 사 오래요.”
“아이고, 네가 서울서 왔다는 대장 할망 손녀구나. 눈도 크고 피부도 흰 게 참 이쁘게도 생겼다. 몇 살?”
“여덟 살요.”
“그래? 아줌마 딸도 여덟 살인데. 잠깐 기다려 봐. 무거우니까 아줌마가 들고 가기 좋게 두 병씩 나눠 담아 줄게. 그나저나 영감님 술을 좀 줄이셔야 하는데.”
봉투를 건네받고 아줌마한테 오천 원을 드리니 이백 원을 거슬러 주셨다. 손바닥에 이백 원을 올려놓은 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아줌마가 계산기를 가져와 내 눈앞에 대고 검지로 1200, 4를 차례로 찍었다.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