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기운이 필요한 순간
2층 커피숍에서 아이스커피를 한 입 쪽 빨며 밖을 내다보았다. 점심시간이라 중국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몇몇 보인다.
'저 집 맛있는데. 짬뽕이나 한 그릇 먹고 들어갈까?'
쓰린 배를 손으로 쓸며 잠깐 고민했지만,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최근 받은 스트레스로 위장 상태가 영 좋질 않다. 오늘 아침 아이가 남기고 딸기 두 알 먹은 게 끼니의 전부다. 그 상태에서 마신 아메리카노 한 잔이 아까부터 속을 마구 긁어댄다. 지금 밀가루를 밀어 넣는 건 내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마침 오늘 읽은 책에 지기(地氣)가 사람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지금 당장 땅의 기운을 품고 있는 뭔가를 먹어야 무기력한 몸이, 우울한 기분이 회복될 것 같다.
감자.
그냥 그 순간 감자가 떠올랐다. 그것으로 무얼 만들겠다는 생각까진 없었다.
유기농, 무농약 식재료를 파는 한살림으로 향했다. 집 앞에 이런 곳이 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새까만 흙이 묻은 감자 1킬로그램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딱 한 팩 남은 자숙 골뱅이와 솔부추까지 계산하고 나서 속으로 메뉴를 결정했다.
골뱅이 무침과 감자전.
대낮부터 막걸리 빠지면 서운한 주막 메뉴라니 좀 우스웠지만, 지금 당장 그게 당기는 걸 어쩌랴. 누가 뭐라든 오늘은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한 점심을 만들고야 말겠다.
골뱅이 무침에 들어가는 양배추, 양파, 오이 같은 건 일체 생략하고 오늘은 영양 가득한 솔부추만 넣었다. 유동골뱅이가 아닌 속살 뽀얀 자연산 골뱅이를 쓰다니, 이게 웬 호사인가. 시판 초고추장에 매실액과 참기름을 조금 넣어 버무리니 맛이 깔끔하다.
감자는 흙을 잘 씻어내 깎고 물을 조금 넣어 믹서기에 후루룩 간다. 강판에 서걱서걱 갈아야 적당히 씹히는 맛도 있고 좋지만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체에 밭쳐 물을 걸러내면 5분 뒤에 전분이 바닥에 가라앉는다. 물만 버려내고 남은 전분과 곱게 간 감자를 잘 섞은 후, 기름을 넉넉히 두른 팬에 앞뒤로 눌러가며 바삭하게 부친다. 불은 중불로 유지한다.
감자가 탄수화물을 담당하니 쌀밥은 먹지 않기로 한다. 약식으로 무친 골뱅이와 꽃소금 한 꼬집 넣어 부친 감자전, 딱 두 개만 차려놓고 천천히 음미한다. TV도, 휴대폰도 보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득한 감자전 식감에 집중한다. 역시 간장을 찍지 않아야 감자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쫄깃한 골뱅이와 아삭한 부추도 환상의 조합이다. 솔부추의 풋풋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순간 '봄 맛이구나' 생각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의욕이 없을 때 타인에게 기대하고 의지하면 관계만 나빠진다. (지금 내가 그렇다. 남편과 3일째 냉전 중이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나를 잘 대접해야 한다. 치장하고 꾸미는 일보다는 스스로 잘 먹이고, 조금 더 움직이는 쪽이 효과가 좋다. 우울하다고 해서 침대를 벗어나지 않거나 라면 따위로 끼니를 때우면 상황은 더 나쁜 방향으로 흐른다. (지난 이틀 동안 내가 체감한 사실이다.)
자, 이제 내게 한 끼 잘 대접했고, 위장도 만족스럽다 하니 해 떨어지기 전에 땅의 기운을 받으러 운동화 신고 나가볼까나.
발은 사람 몸에서 땅과 가장 가깝다. 땅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몸의 공간인 셈이다. (중략) 그런데 방황을 잘못하면 집에 틀어박힌다. 발이 땅에 닿지 않게 한다. 지기(地氣)를 거부하는 셈이다. 지기가 올라오지 않으면 신장의 기운이 허해져 비장의 토 기운을 제어할 수 없다. 비장의 토 기운이 과해지면 일단은 소화가 잘 안 된다. 소화시키고 영양을 공급하는 운화작용이 힘들므로 몸의 끝 부분인 사지까지 영양이 덜 간다. 무기력해지고 꼼짝도 하기 싫어진다. 사지가 무거워진다. 그리고 비장의 영역인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지면 움직이기 싫어진다. 더 틀어박히고 만다. 악순환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햇살 아래서 많이 걷는 수밖에 없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걸어야 한다. 문 밖에 길이 있다.
디아,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