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15일 목포에서 우리나라의 해군이 될 것을 결심한 나는 그 즉시 진해에서 약 2개월 동안의 훈련을 받았다. 전국에서 모집된 5백 명의 훈련병은 당시 미 해병이 사용하고 있던 약 3백 평가량의 창고를 병사로 사용했다. 더욱이 그때는 예산 등이 빈약한 때였으므로 모든 게 부족했다. 훈련병들의 옷차림은 그때의 형편을 충분히 짐작하게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완전한 사복 차림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어떤 병사는 상의는 미 해군 복장을 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병은 하의만 착용한 병사가 있어 훈련장은 마치 서커스단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2개월의 훈련을 끝낸 나는 3등병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병조장(지금의 특무상사에 해당)으로 승진되면서 제주 등지를 비롯한 남해 지구의 경비임무를 띠고 첫 항해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승선한 ‘금강산정’은 당시 이승만 라인(해리 12마일)을 불법 침입해서 어로작업을 벌이고 있는 일본 어선들을 나포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 이때 우리 승무원들은 뛸 듯이 기뻤다. 그것은 36년 동안 압박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그들을 잡으러 가는 임무를 받았기 때문이다.
무기라고는 99식장총 10정뿐인 우리는 제주 남해 5마일 지점에서 일본 어선단을 발견, 그들을 추격했으나, 시속 10노트에 철선인 일본 어선들은 재빠른 속력으로 도주를 하기 시작했다. (금강산정은 시속 5노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중 한 척의 일본어선이 우리에게 나포되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나포된 일본어선은 고기를 갑판 위까지 산더미처럼 실었기 때문에 속력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강산정은 제주의 비양도 부근에서의 갑작스러운 풍랑으로 인해 좌초되었고, 철선인 일본어선은 99식 장총의 사격에도 아랑곳없이 도주해버렸다.
배를 구출하기 위해 선원 모두가 3시간 동안 노력했지만, 아무 보람도 없이 승무원 전원은 배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고 제주읍에서 얼마 떨어진 섭제 부락에 주둔하게 되었다. 20명 정도 되는 제주 해녀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육지에 올라온 우리는 약 3개월 동안 빈 드럼통을 이용해 배를 인양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엔진만을 뜯어내는 쓰라린 고통을 겪었다.
운명은 나에게 계속 시련을 가해왔다. 배를 잃어버린 우리가 섭제에 주둔한 약 4개월 뒤인 1948년 4월 3일 그 유명한 제주 4·3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평온하기만 했던 제주도 일대는 곳곳에 불기둥이 솟았고, 공비와 폭도들은 군경은 물론, 민간인까지도 보는 대로 학살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게릴라 전법의 기습작전을 감행한 공비들은 ‘우리는 군인과는 감정이 없다’, ‘우리는 경찰의 행패를 막기 위한 것이다’는 허무맹랑한 선전으로 군의 공비소탕을 은근히 늦춰 보려 했다.
부대의 지정 막사를 얻지 못한 채 인근 민간인의 집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어느 날 새벽 나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사건을 당했다. 그것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고 씨 할머니 댁의 대청마루에 보관한 99식 10정 중 쌍가늠대가 달린 성능 좋은 5정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이날 새벽 잠결에 흥분한 고 할머니가 “아주베, 아주베 (아저씨)”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고 할머니는 앞마당에 떨어져있는 대검을 가리켰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나는 총을 보관했던 대청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예감은 적중했다. 성능이 좋은 다섯 자루의 총이 보이지 않았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침몰된 금강산정 등을 머리에 그리면서 이제는 끝장이구나 했다.
나는 곧 고 할머니 집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숙소를 둔 곽의영 참위(금강산정의 기관장이며, 현재의 소위임)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때 곽 참위는 별로 놀라는 빛도 없이 나의 등을 만지면서 “이 사실을 정장(=김병균 소위)이 들으면 배를 잃어버린 충격이 가시지 않은 때라 자살을 해버릴 우려가 있으니 우리끼리 총을 찾아보자”라고 말했다.
곽 참위는 기관부 김 하사를 불러 이 사실을 논의했다. 이때 곽·김 등은 총기 등 서북청년회의 짓이라고 단정했고 나는 우선 서북청년회를 일단 조사키로 했다. 조사의 결과는 분명했다. 총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이 사실을 김병균 정장에게 보고했고, 아연실색한 김 정장은 우선 당시 모슬포에 주둔한 9연대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리면서 협조를 당부했다.
9연대는 생각할 필요 없이 이는 한라산 공비의 소행이라고 단정, 한라산 일대에 자수를 권고하는 삐라를 살포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군대가 공비토벌을 벌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공비들이 이에 응할 리가 없었다. 당시 우리는 목포로부터 모든 물자를 보급받았었는데 하루는 보급물자를 받아오기 위해 8명의 대원 그리고 곽 참위 등 10명이 반 트럭을 타고 제주읍으로 향했다. 한라산 일주도를 달린 우리, 외도지서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총성을 들었다. 마침 4·3 사건 발생 후여서 불안한 가운데 99식 5정을 대원들에 나누어주고 경계를 펴면서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지서 앞 50m 지점에 도착했을 때 길 양편에서 공비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즉시 전투를 명령했는데, 이때 곽 참위는 저놈들이 우리를 경관으로 착각했다면서 군인인줄을 알면 총을 멈출 것이니 전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 공비는 계속해서 총탄을 퍼부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곽 참위는 전투를 명령했다. 나는 대원 4명을 끌고 공비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조국에 돌아온 이후 첫 전투를 치른 것이다. 우선 지서에 도착하니 지서는 이미 불이 타버렸으며 3명의 경찰관이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공비들은 도주해버렸다. 그런 동안에 곽 참위는 동해안의 경비 임무를 맡고 고원정 호의 기관장으로 발령받았는데 곽은 불과 10일 만에 고원정 호를 끌고 월북해버렸다.
나는 이때야 비로소 곽이 공산당의 프락치였던 것을 알았다. 또 김 하사가 수상쩍어 이를 찾았을 때는 그 역시 행방불명이 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