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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비 Mar 20. 2021

Ep 2. 밀선으로 귀국

고국으로 돌아와 해군에 첫발을 딛다

  얼마를 뛰었을까?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 듯했고 군복은 마치 소나기를 맞은 것 같았다. 어림잡아 30리(약 11.8km)는 뛰어온 것 같았다. 그래도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시라기 네 이놈 여기 있었구나”하는 일본군의 고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의 이름이 ‘시라기 新羅(신라)’로 불린 것은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기 위해 개명한 것이었다. 나의 일본도에 맞은 그 장교는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선 길가를 지나가는 트럭을 운전사 모르게 올라탔다.


  트럭에 오르자 마음이 약간 안정된 듯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더니 일본 돈 2백 원이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 나의 침실에 모아두었던 월급 7백 원을 가져왔더라면 귀국길이 더욱 손쉬웠겠다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트럭은 벌써 후쿠오카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도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또다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본군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복으로 바꿔 입는 것이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트럭은 가와사키까지 와주었다. 나는 여기서 오리오 사범학교에 다닐 때 사귄 미치코의 집으로 가서 사복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첫사랑인지도 모를 미치코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구니사키(미치코의 부친) 사장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구니사키 사장 집은 대문이 활짝 열린 채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방안에 뛰어든 나는 검은색 바지와 때 묻은 청색 셔츠를 군복과 바꿔 입고 시모노세키로 나가 밀선을 이용해서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곳까지의 교통수단이 걱정이었다. 나는 밤새 뛰다가 지치면 걷겠다는 결심을 하고 길가로 나왔다. 마침 트럭이 한 대 왔다. 손을 들었더니 운전사는 의외로 싱글벙글하면서 차를 세워주었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18세 정도로밖에 안 보인 운전사는 나에게 한국인이 아니냐면서 자기는 지금 시모노세키에 있는 형님을 찾아간다면서 타고 싶으면 타라고 했다. 나는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약 30분 정도를 달린 뒤에야 운전사는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때야 마음이 놓인 나는 밀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밀선도 안내해 주겠다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렇지만 지나친 친절이 오히려 불안했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면서 운전사 곁을 떠나 항구 쪽으로 달려갔다. 밀선을 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백 원이란 공정 가격이 정해져 있었다. 주머니 속의 2백 원을 만지작거리면서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밀선을 타기로 한 일행은 모두가 한국인으로 20명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을 뱃속에서 지냈다. 밤이 깊도록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미치코와의 지난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집에까지 갔으니 편지라도 한 장 남겨두고 올 것을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녀와의 지난날이 생각났다.


  다나베 해방병단에 입대하기 얼마 전인 수요일. 오리오 극장에서 전쟁영화를 보고 나온 길이었다. 2층 계단을 내려오던 미치코가 발을 잘못 디디어 넘어질 뻔한 것을 달려가서 일으켜주었다. 이때 미치코는 나이가 나보다 4살이나 많았기 때문이었는지 무척 태연한 표정을 보이면서 오는 토요일에 다시 극장 앞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극장 앞에서 다시 만난 미치코는 시모노세키행 기차표 두 장을 보이면서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나는 미치코가 끌고 가는 대로 역으로 행했다. 싫지 않은 여행이니 뿌리칠 생각은 아예 없었다.


  우리는 밤늦도록 시모노세키 항구 일대를 돌다가 다카하시 여관에 투숙했다. 나는 이때 학생 신분인 것은 물론 여자와의 여관 투숙이 처음이었으므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치코는 자기의 나이가 네 살이나 위이니 누이라고 하면 될 것이라면서 아주 태연했다. 그녀는 이날 밤 “시라기 상은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느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국에 있는 나의 부모를 섬길 각오도 되어있다고 했다. 우리는 결국 이날 밤에 굳은 언약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미치코의 얼굴이 더욱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서 어쩌면 이곳에서 불과 5분 거리인 다카하시 여관에 그녀가 와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다카하시 여관에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시장 앞다리를 건너면 꼭 있을 줄로 믿었던 다카하시 여관은 보이지 않았다. 폭격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을 뿐 여관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지 5년 뒤에야 인편을 통해 구니사게가 원폭 때 사망했으며 미치코는 그때까지 혼자 살고 있더라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고국인 부산을 거쳐 고향에 돌아온 것은 9월 중순께로 기억하고 있다. 이때 조국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한 기쁨이 지나친 데다가 소련의 붉은 마수가 손길을 뻗기 시작해서 사회적인 혼란이 무척 심했다. 한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 각종 정당 그리고 사회단체가 난립했는가 하면 북한에서는 조국통일 건국위원회를 조직했고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약칭)에서는 사회 혼란에 편승, 좌·우익이라는 용어가 자주 튕겨 나왔다.


  해가 바뀌어 1946년 3월 15일 나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이 3면이 바다라는 점을 감안 창설을 서두르는 우리 해군에 입대한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신안에서 목포로 나왔다. 때마침 목포에서는 해방병 단원 모집을 위한 가두방송이 있었다. 나는 해병단의 간부인 김진한 씨를 찾아갔다. 김 씨는 나의 경력을 들은 뒤 두 손을 꼭 잡으면서 지금 미국으로부터 군함을 인수하려고 하나 인원이 없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우리 해군에 들어간 첫걸음이었다.


배경 이미지: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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