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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비 Mar 20. 2021

Ep 1. 일본 특공대 탈출

8월 15일, 광복의 생생한 기억

  나의 군대 생활 첫발은 일본 와카야마현의 다나베 해방병단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나의 나이는 18세로 후쿠오카사범학교의 4학년 졸업반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나에게 졸업이 전인데도 졸업장을 내주면서, 군대에 입대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때는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는 연합군의 비행기 폭격이 그치지 않는 때였다. 1945년 1월 8일 다나베 해방병단에 입대한 나는 전·후반 6개월 동안의 고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총력전’이라 이름이 붙은 훈련과정은 일주일동안 일월화수목금토요일로 정했다. 이것은 일요일에도 훈련을 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무릎과 엉덩이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는 강훈련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밥을 굶기가 일쑤였다.

'일월화수목금토요일'은 휴일 없이 매일 훈련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만의 표현.


  내가 소속된 7분대에는 가나이 후쿠류(김정복룡·19세)라는 함경도 출신의 한국인도 있었다. 해방병단에 입대한 지 약 2개월 후였다. 후쿠류가 나에게 보낸 비밀쪽지에서 병단 안에는 5명의 한국인이 있으나 이들은 너무도 많이 굶었기 때문에 허기에 지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밥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 훈련소장의 당번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일이면 다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을 받던 중 첫 번째 사고가 발생했다. 중국인 한 사람이 버린 밥을 주워 먹다가 들킨 것이다. 그는 두들겨 맞다가 정신병자가 되어 병원으로 수송되었는데, 생사는 알 수가 없었다.


  미국 B29가 일본 본토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훈련을 끝내고 전쟁터로 팔리는 몸이 되었다. 극비리에 내가 배치된 부대는 이시가와현의 고마스 항공대였다. 이 기지는 ‘독고다이’ 비밀기지로 일본군은 물론 연합군들도 잘 알고 있는 부대였다.(현재 '가미카제'라고 부른다) 부대에 들어오면서 나는 첫 눈에 이곳에 한국인 노무자가 무척 많다는 것을 느꼈다. 이곳 기지의 경리 무장 당번을 보게 된 나는 이곳에 도착하면서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5년 8월 6일 비행장에서는 군 간부회의가 약 4시간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은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밤 10시께 헌병의 눈길을 피해 나의 부대 북쪽에 자리 잡은 한국인 노무자 숙소로 달려갔다. 노무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온종일 시달린 피로에 지친 나머지 나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듯했다. 나는 이윽고 그들에게 일본이 곧 항복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노무자들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너무도 당연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니또헤이‘(이등병) 계급장이 붙어있는 일본 군복의 사나이가 하는 말이기에 오히려 두려운 표정을 보일 뿐이었다. 노무자의 표정은 아랑곳없이 나는 얘기를 계속했다.

“여러분들, 고국을 떠나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나도 한국인입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만 몸조심하십시오.”

라는 말만 남기고 급히 나의 숙소로 돌아왔다. 이어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기지내의 일군(一群)들은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항공기는 계속해서 출격시켰다. 1회에 2·3대씩 출격한 비행기들은 목표지점까지만 갈 수 있는 기름을 공급받으면서도 활주로를 줄기차게 떠나갔다. 이것이 바로 세칭 ‘독고다이’ 편대인 것이다.


  조국을 빼앗긴 지 36년. 드디어 8월 15일 감격의 해방일을 맞았다. 15일 상오 고마스 항공기지의 2백 평 남짓한 강당에는 노무자를 제외한 모든 군인들이 모였다. 히로히토 천황의 중대 발표를 듣기 위해서였다. 방송내용은 일본이 항복한다는 것이었으나 이날의 수신 상태가 얼마나 나빴던지 강당의 절반 이상 군인들이 이 소리를 똑똑히 듣지 못했다. 강당 안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천황폐하를 소리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고 와장창 각종 기물이 부수어지는 아수라장 속에 3명의 일본군 장교가 할복자살을 했다. 피와 통곡의 울부짖음이 이토록 두려울 수가 없었다. 나는 이곳을 빨리 탈출하는 것이 안전하겠다는 것을 느끼고 곧 밖으로 나왔다.


  노무자들은 징과 꽹과리 등을 두들기면서 두둥실 춤을 추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참으로 몇 년 만에 외쳐본 애국가인가. 그러나 이것도 순간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본군 장교 2명이 휘두른 일본도에 우리 노무자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노무자들은 철조망을 넘어 탈출하기 시작했으나 철조망을 채 넘어가지 못한 3·4명의 노무자가 끝내 비명을 남기고 말았다. 일군(日軍)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결심했다. 허리에 찬 일본도를 꺼내 그들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중 1명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조센징-”하고 소리를 치면서 강당 쪽으로 도주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철조망을 넘어 뛰기 시작했다.



배경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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