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해전, 여수 앞바다로
제주 남해안에서 최초로 승선한 금강산정을 잃어버리고 또 직속 상사인 곽의영 참위가 공산당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 등이 계기가 되어 목포 기지로 근무처를 옮긴 우리는 매우 허전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1948년 10월 20일, 그 유명했던 여·순 반란 사건이 발발해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14연대 내의 좌익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시를 완전히 점령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밭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해군의 302, 305, 516정 등이 맥아더 라인을 침범했다가 붙잡힌 일본 어선 2척을 인수하기 위해 여수항에 정박 중이었기 때문에 해군 총사령부에 이 사실이 즉시 보고되었다. 따라서 사령부에서는 진해에 정박 중인 충무공 510, 304, 302정 등을 즉각 여수항에 출전시켰으며, 목포에 있는 505정에게도 전투명령을 내렸다. 나는 대한민국의 해군이 된 이후 첫 번째의 해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때의 총지휘관인 이상규 소령은 10월 23일 새벽, 505정에게 목포항을 출항하라고 명령했다.
이날 오후 2시께 여수항 3마일 지점에 도착한 우리는 공비들에 의해 폐허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는 여수시가지를 볼 수 있었다. 여수시 일대는 검은 연기로 가득한 가운데, 이따금 들리는 총성, 그리고 불기둥의 연발이었다. 505정이 부둣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전방 약 1마일 지점에서 발동선 한 척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 소령은 의아한 표정 속에 발동선을 주시하면서 대원들에게 완전한 전투태세를 지시했다. 이윽고 약 500m 지점까지 다가온 발동선에서도 갑자기 우리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는 즉시 40mm 기관포 3정, 그리고 30mm 경기관총 5정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이때 우리가 갖춘 기관포와 경기관총은 최신 무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적의 발동선은 기수를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으나 3마일도 채 못 가서 우리에게 나포되었다. 배에 타고 있던 21명의 적은 모두가 북에서 직접 내려온 소위 빨치산인 것을 그때야 알고 우리는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들의 무기는 기관총이 1정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따발총이었다.
첫 해전에서 자신을 얻은 우리는 다시 여수항으로 기수를 돌렸으며 여수시가지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약 1천 명 정도의 폭도들은 항구의 지형물을 방패 삼아 함대를 향한 집중 사격을 가해왔다. 30분가량의 전투가 불꽃을 튕기는 동안 남해를 출발한 충무공정 등의 우리 함정들이 여수항에 도착했고, 총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약 2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폭도들은 당시의 고성능 무기인 기관포의 위력을 저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음인지 서서히 후퇴하는 기세였다. 그러나 우리는 해전의 임무만을 명령받은 것은 물론, 육전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에 도주하는 폭도들을 바다에서 쳐다만 보는 안타까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해군은 이때의 경험을 뒷받침으로 삼았고, 그 이듬해인 1949년 3월 1일 수륙 양면 전투를 할 수 있는 한국 해병대가 창설된 것이다.
폭도들과의 전투가 일단 중지된 틈을 이용해, 우리는 3명의 수병을 육지로 올려보내 현지의 사정을 상세히 알아 오도록 했다. 잠시 후에 함대로 돌아온 수병의 보고는 너무도 엄청났다. 반란군들이 시민들에게 남한 일대가 이미 공산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허위 선전을 하여 많은 시민들이 이에 현혹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같은 보고를 받은 이 소령은 즉시 항구에 있는 함대 전체에 태극기를 올리도록 명했다. 그것은 공산 폭도들의 선전이 허위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여수항에 도착한 지 꼭 24시간이 되는 24일 새벽 3시께였다. 조용하기만 한 수평선 저 멀리에서 수상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총 8척의 우리 함대는 곧 전투준비를 완료하고 수상히 여긴 선박이 좀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한편 함대 무전실에서는 사령부에 또 다른 우리 측의 함대를 파견했는지를 확인했다고 회답했고, 돌아온 답은 그런 사실이 전혀 없으니 일단 적선으로 인정,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고 모두 나포하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긴장된 시간이 약 30분 동안 흘렀다. 또다시 수색함대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선박 2척이 앞서 오고 있으며 그 뒤에 함대와 비슷한 발동선 3척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함대를 바다의 외딴섬에 모두 은폐시킨 뒤 그들을 나포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린 지 1시간 30분. 육안으로 보기에도 적의 함대임이 분명했다. 새벽 5시께 우리 측으로부터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완전히 포위된 적의 함대는 혼비백산한 가운데 도주할 수 있는 길을 찾느라고 진땀을 뺐으나 이미 함정에 빠진 쥐여서 어쩔 수 없었다. 적함과의 교전은 상상보다 오래 걸렸다. 그들도 포와 기관총으로 완전 무장을 했기 때문이다. 3시간 정도의 공방전 끝에 적함 1척이 수면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선박 2척은 이미 우리의 포로가 된 것은 물론이다.
이윽고 그들은 항복을 뜻하는 백기를 올렸다. 불꽃 튀기는 3시간의 해전이 막을 내리고 여수항 주위에는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포된 적의 함대는 북괴가 직접 여·순 폭도들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것이 다시 확인되었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모두 6척의 적 함대를 나포했고, 포로는 모두 248명이며 총 사살자는 확인치 못했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 확실히 확인된 시체만도 39명이 되었다. 그리고 40mm 기관포 5정, 소총 196정, 탄약 13362발이 노획되었다. 한편 아군의 손해는 전사자가 1명, 부상 2명의 가벼운 손실을 본 가운데 선체는 수많은 총탄을 받았다. 나는 여·순 사건이 거의 진압된 11월 초에 다시 목포 기지로 돌아왔다가 제주 4·3 사건에 다음가는 전남 해남 경찰서 공비 기습 사건에 참전했다.
※ 현재는 여순 사건이라 명명하나 필자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고자 하기 때문에, 제목에는 여순 사건이라고 적었지만 본문에서는 여순 반란 사건이라는 표현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하단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여순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이다.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 홍순석은 조선 국방경비 사관학교 3기생으로, 이 기수 중에는 좌파적 경향을 띠는 인물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는 당시의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후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에서 제14연대가 창설되었고, 창설 요원 가운데에는 김지회, 홍순석과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하사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창설 과정에서 좌익 계열 모병관들은 반이승만 계열, 좌익 수배 사범 등을 적극적으로 모병하였으며, 그 결과 연대 내에는 남로당의 세포 조직이 침투하게 되었다. 또한 제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출처: 여순사건 - Daum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