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2월 12일 깊은 밤을 이용한 공비 70여 명의 해남 경찰서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공비들은 조규태 경위(경무과장)를 비롯한 7명의 경찰관을 사살하고 도주한 것이다. 경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우리는 바야흐로 해군으로는 최초의 육전에 참여해야 했다. 40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출전준비를 완료한 김동준 소위(소대장)는 이렇게 첫 말문을 열었다.
해군은 육전에 참여하지 않게 되어있으나 사태가 긴급해서 출전하게 되었다. 모쪼록 각자가 목숨을 지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같은 김 소위의 얘기를 들으면서 고원정을 끌고 월북한 곽의영 참위의 갖가지 지난날이 뇌리를 스치면서 불안한 예감까지 들었다.
경찰이나 공비에 비해 30mm 경기관총과 총류탄 등 최신 무기를 가진 우리는 곧이어 경찰과 사격전이 한창인 해남읍 뒷산에 도착했다. 산은 해발 5~600m가량 되어 보였다. 이때만 해도 우리 경찰과 경비대원들은 대부분이 전투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공비와 맞붙어 사격전을 벌이기에는 약간 벅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적전 산의 상봉을 넘어선 8부 능선 한 군데에 모여 있는 듯했으며, 경찰은 산 중턱에서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경찰 지부를 찾아 이런 전투 대열은 몹시 위험한 것으로 경찰이 오히려 역습을 받을 우려가 있음을 알렸다. 내 말을 들은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2명의 경찰관이 벌써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김 소위는 나에게 화를 버럭 내면서 네가 소대장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소대장인 자신의 허락 없이 경찰 간부와 연락을 취하지 말라는 주의였다. 몹시 불쾌했지만 참아야 했다. 그리고는 기선을 놓치기 전에 공격을 감행하면 모두 사살할 수 있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김 소위는 작전은 내가 할 테니 명령만 지키라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그러면서 너는 부소대장 직에 있으면서 부하 대원들을 생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다고 하면서 과감한 공격을 회피하는 듯한 눈치였다. 또다시 공산당의 프락치였던 곽 참위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면서 분통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나는 홧김에 “죽어도 나 혼자 죽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단신으로 고지 상봉을 향해 포복을 시작했다. 상봉 바로 밑까지 와보니 상봉에는 예상대로 공비 5~6명이 아군의 진격 형태를 망보는 정도이고 나머지는 상봉 너머 8부 능선에 자리 잡은 것이 분명했다. 욕심이 생겼다. 저놈들을 모두 사살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포복을 지속했다. 이때였다. 산 중턱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 소위가 소리를 질렀다. 위험하니 고지에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적들은 김 소위의 고함을 들었는지 내가 있는 곳에 집중 사격을 가해왔다. 나는 할 수 없이 중턱으로 내려와 김 소위에게 대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어느 편이오?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나의 위치를 공비에 알려준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소?”라고···
그러자 김 소위는 얼굴색을 바꾸면서 무척이나 인자한 태도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지른 것이다”라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달랬다. 그리고는 김 소위는 8부 능선을 향해 총류탄 발사를 명했다. 1탄, 2탄, 3탄······ 발사되는 총류탄의 폭음은 마치 함포사격을 방불케 했다. 이 같은 폭음에 공비들은 혼비백산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이 전투가 끝나서 포로가 된 공비들의 말은 해남 앞바다에서 함포사격이 시작된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흥사 북쪽 뒷산의 능선을 따라 도주하는 공비를 추격하는 가운데 밤을 맞아야 했다. 결국, 우리는 추격을 중단하고 대흥사에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여기서 나는 또 김 소위와 이날 밤의 경비 계획을 두고 시비를 벌이다가 끝내는 단독으로 대원들의 경비를 지시했다. 나는 절터가 양편에 산을 두고 있는 점을 고려해 적의 기습을 최대한으로 방지할 결심이었다. 나의 제2 능선 경비를 반대하고 1선 만의 경비 대열을 주장한 김 소위는 나에게 ‘혹독한 놈’이라면서 대흥사 내에 임시로 마련한 그의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군화도 벗지 않은 채 보초선을 수시로 순시했다.
새벽 2시쯤이었다. 제1선 보초가 뛰어왔다. 그는 “부소대장님, 지금 이상한 여자를 하나 붙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제2선 경비를 세운 것이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여자는 우리의 경비를 탐색하러 온 공비가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22세가량으로 보인 처녀의 옷은 갈기갈기 찢겼고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뿐만 아니다. 동상으로 발이 부어있었다. 30분 동안의 심문에도 처녀는 경찰서 습격 때 놀란 나머지 산을 헤매고 있다는 얘기였다. 잠시 후 심문 장소에 나온 김 소위는 처녀가 무슨 빨갱이겠느냐면서 자기가 심문을 하겠다고 절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즉시 소대장 모르게 병사 1명을 경찰서로 보내 경찰관을 데려오도록 했다. 이튿날 정오께 대흥사에 온 경찰관이 처녀를 보자 내뱉은 첫마디는 “너 이년 잡혔구나”였다. 그 경찰은 공비가 경찰서를 습격했을 당시 이 처녀와 30대 부인이 2명 있었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전후 사정을 목포기지로 보고하고 김 소위와 함께는 적을 추격하지는 않겠다고 발을 뻗었다. 증거가 없을 뿐이지 김 소위는 공산당 프락치라는 신념이 나의 머리에 굳었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을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나는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금방이라도 대원들이 떼죽음을 당할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전했다. 결국, 이런 사건을 계기로 김 소위는 목포 경비사령부의 프락치 총책임자인 것이 판명되어 마산 형무소로 수송 중인 트럭에서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나는 또 목포에 있는 동안 내 일생 두고 잊지 못할 사고를 목격해야 했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해남 출신인 이해묵 소위와 그리고 박성철 소위(목포지구 헌병대장)와 함께 위병소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4·5 구경 권총은 군인들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 소위는 얼마 전 해남 자기 집에서 권총으로 닭을 쏘았다면서 총을 손질할 목적으로 탄창을 빼놓은 뒤 한참 동안 총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쾅하는 폭음이 터지면서 위병소 안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이 소위는 이미 탄알이 한 발 장전된 것을 모른 채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결국, 이 소위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고인이 되고 말았다. 해방병단의 창단 요원인 故(고) 이 소위는 이봉출 장군, 해병대장을 지낸 강기천 장군과도 동기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