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의 잔여 공비를 토벌하다
1949년 3월 1일 한국의 해병대가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신현준 초대 사령관은 이해 6월에 해병 사관생을 모집했다. 나는 이때 과거 몇 차례의 공비 소탕전이 공산당 프락치 곽의영과 김동준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던 것을 생각했고, 내가 직접 장교가 되는 길이 곧 공산당을 잡을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공개경쟁시험으로 모집된 해병 간부후보 제1기생은 모두 30명이었다. 이 중 나를 비롯한 8명이 해군 출신이었다. 7월 1일 서울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우리는 6개월의 고된 교육 기간을 거쳐 1950년 1월 14일 자랑스러운 해병 소위에 임관했고, 본격적인 군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사관학교 교장인 김홍 장군(전 신민당 당수)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나는 1월 28일 ‘4·3 사건’의 잔여 공비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고,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6중대 3소대장에 임명된 나는 신 사령관으로부터 몇 가지 특별지시를 받았다. 신 사령관은 ‘4·3 사건’에 따른 민간인의 조사대상에 많은 제주도민이 해당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우선 민심을 수습해야 한라산의 공비 토벌이 보다 용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군인은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경애하자’라는 당시 표어를 하루도 잊지 말자고 당부했다. 민심의 수습은 의외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내가 제주도에 도착한 지 2달이 지난 3월, 해병 간부후보생 제3기생 모집이 있었는데 대부분 제주 출신이 응모했다. 제주도민들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스스로 해병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5월부터 한라산의 공비토벌을 위한 작전명령이 내려졌다. 산은 밀림지대인 데다가 시기적으로 5월이었기 때문에 갖가지 잡초까지 무성해서 해병만의 작전은 불가능했다. 우선 한라산의 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라산의 수색전에는 언제나 민간인 안내자를 동반해야 했다. 5월 중순쯤, 나는 소대 병력을 이끌고 한라산 오루목을 숨소리 하나 없이 오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앞서가던 안내자가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안내자가 공비를 목격했다는 것을 직감하고 “제1중대는 우편으로, 2중대는 좌편으로, 3중대는 현 위치에 엎드려!”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소대 병력을 끌고 간 내가 이렇게 1중대· 2중대 운운한 것은 공비들이 많은 병력이 온 것으로 오인함으로써 기습의 사기를 꺾자는 데 뜻이 있었다. 이윽고 공비와 우리는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우리 소대는 솔직히 적의 위치도 알지 못한 채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공비들은 우리의 병력이 상당수인 것으로 착각하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곧 전투 대열을 정비하고 도주하는 공비를 추격했다.
2백 m가량을 추격한 우리는 공비들이 도주하는 발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차례 집중 사격을 계속하고 또다시 전진했다. 50m쯤 전진한 자리에서 우리는 공비 시체를 발견하고 나는 자지러질 뻔했다. 뒤통수를 정면으로 관통한 채 완전히 숨이 끊긴 공비는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곽의영이 ‘고원정’을 끌고 월북한 직후 행방불명이 되었던 ‘금강산정’의 기관부 선임 하사관 김인임이 분명했다. 너무도 어이없는 사실에 정신을 잃을 듯한 나는 우측 50m 지점에 갑자기 추격전이 시작된 것을 알고서야 그쪽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공비의 숫자가 우리 4~5배가량은 되는 듯 보였다. 총탄이 위아래에서, 옆에서 비 오듯 쏟아졌다. 더욱이 날은 저물기 시작해서 아군이 전투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할 수 없이 후퇴 명령을 내린 뒤 김의 시체만을 끌고 부대로 돌아왔다.
밤늦게 모슬포로 돌아온 나를 본 김성은 부대장(당시 소령=전 국방부 장관)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순간 의아했다. 김 부대장은 나에게 “박 소위는 군모를 벗고 다녀도 된다는 특명을 받았느냐”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공비토벌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지만 등골에 땀이 오싹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꼭 있어야 할 군모가 없었다.
김을 사살한 공과의 칭찬은 포기해야 했다. 이날 밤 12시 나는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던 어북 방송에서
오늘 오후 7시께의 한라산 전투에서 용감한 우리의 빨치산 동무들이 남반부의
괴뢰군 박정모 소위를 사살했다
라는 소리가 흘러나온 것이 아닌가. 말할 나위 없이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나는 다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김 부대장이 뛰어왔다. 그 역시 방금 방송을 듣고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다. 김 부대장은 나를 보더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면서 나에게 유령이 아니냐고 했다. 나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 바를 모른 채 부대장의 얼굴만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밤새도록 도깨비에 홀린 듯한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다음날 후퇴를 한 한라산 오루목 우측 1km 지점을 다시 수색하기 위해 부대를 떠났다. 이날 수색전에는 김 부대장이 직접 나선 대대 작전이었다. 마음이 든든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의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어제의 비 오듯 쏟아지던 총성은 온데간데없었다. 고요한 적막이 온 산야에 있었다.
이때였다. 우리보다 약 20m쯤 더 나아간 수색병이 동굴을 발견했다는 보고였다. 김 부대장과 나는 곧 동굴로 쫓아갔다. 길이가 20m에 굴 안의 너비는 좌우 10m가 충분한 천연 동굴이었다. 굴속에 남긴 갖가지 물건들로 보아 빨치산의 본부인 듯했다. 공비들은 어제 우리와 전투에서 자기들의 아지트가 발견된 것으로 알고 이미 자리를 뜬 것이 틀림없었다. 동굴 내에는 소를 잡아먹은 흔적이 뚜렷했다. 소 창자의 썩어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굴 안을 수색하던 대원 1명이 공비의 사용물이 있다고 외쳤다. 동굴 어둑한 곳에 99식 장총 3자루와 탄약 50발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소위 계급장이 정면에서 뚫려있는 나의 모자를 발견했다. 그때야 어젯밤의 북괴 방송을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