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새벽에 인천에 상륙한 미 해병과 우리는 꼬박 하루 동안의 전투 끝에 인천을 완전히 적의 손에서 되찾았다.
이에 16일 우리 해병은 서울 탈환을 위한 작전명령을 받고 주안 평야의 진격을 시작했다. 주안 평야의 진격은 매복해 있던 적의 산발적인 공격이 많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의 공격이 여기서 활기를 보이지 못한 것은 적과 우리의 시민을 구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도주하는 공산군들은 그들이 착용했던 군복을 벗어던지고 모두가 평복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습이라는 복병과 전투를 해야 하는 악전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패퇴하는 적에 비해 하늘을 찌를 듯한 우리의 사기는 괴뢰군의 변복한 모습을 곧 알아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나의 부대 척후병에게도 평복으로 변복을 시켜 괴뢰군의 판단이 흐려지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았다.
우리는 누렇게 익어가는 주안 평야 일대의 진격에서 수많은 적을 포로로 잡았다. 무기의 노획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마치 낙엽을 줍듯 했던 당시의 괴뢰군 포로 중에는 강압에 못 이겨 끌려간 평민이 너무도 많은 것을 보고 우리는 더욱더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나는 이때에 처음으로 소제 권총을 한 자루 노획, 이 권총을 전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념품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평복으로 변복을 시킨 척후병 5명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였다. 정면 200m 지점 논 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부하들을 엎드리도록 하고 그를 눈여겨보았다. 손에는 플래카드를 들었는데, 여자인 것 같았다. 그 여인은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우선 권총을 굳게 쥔 뒤에 왼쪽 손을 들어 응답했다. 여인은 내가 있는 쪽으로 뛰어오면서 金日成(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것이었다. 우리의 변복을 괴뢰군의 변복으로 착각한 것이다. 대원들에게 사격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가 뛰어오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인은 무기를 갖지 않은 듯했다. 그 여인은 말할 것 없이 괴뢰의 여군인 것이 곧 탄로 났다. 손에 쥐어있는 플래카드에는 역시 ‘김일성 동지 만세’라고 쓰여 있었다. 이 여인의 몸수색에서 소제 권총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당시 우리가 주안 평야를 진격하는데 얼마만큼의 애로가 있었는가를 짐작케 할 수 있다. 이어 김포평야를 거쳐 행주나루터에 도착한 나는 잠시 상부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 휴식을 취했다. 나루터를 도하하면 서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곧 서울에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누나의 가족이 걱정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서울에서 사관학교에 다닐 때였다. 6·25 당시 무안군수를 지냈던 김영춘 씨가 나에게 S누나를 소개해준 것이다. 나는 강태민 씨(당시 새문교회·목사)의 부인인 S누나 강인숙 씨의 집을 찾는 날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한 번은 누나 집에 외출을 나왔다가 그만 기차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이때만 해도 태릉 사관학교까지의 교통수단은 기차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이용하라는 누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는 그날 밤 서대문에서 학교까지 3시간을 달렸던 것이다. 뛰다가 지치면 걷고, 이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한 나의 모습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사지 군복은 마치 물속에서 건져낸 것과 같았다. 지난날의 이 같은 회상은 나에게 서울의 탈환을 더욱 재촉했다. 드디어 9월 21일 밤. 우리에게 전투명령이 하달되었다.
서울 입성에 가장 중요한 연희고지와 104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었으며, 이곳의 적병은 약 2개 혼성여단(1만 6천여 명) 병력으로 괴뢰군이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진을 친 막강한 병력이라는 정보였다. 수륙양용 전차를 이용한 행주나루터의 도하는 아무 사고 없이 순조로웠다. 22일 새벽 진을 치고 기다리던 우리는 날이 밝아진 것과 때를 같이해서 고지 탈환을 위한 제1차 공격을 시작했다. 적의 화력은 예측한 것과 똑같았다. 기관총과 박격포 등의 화력은 우리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결사적인 방어를 한 것이다. 새벽부터 시작한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할 뿐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아군 쪽이 더 큰 피해를 보는 듯했다.
이날 오전 11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는 벌써 50여 명의 아군 전사자가 나왔다는 연락병의 귀띔이었다. 사실 진격군으로서의 50여 명 전사는 대단한 손실인 것이다. 결국 1차 공격은 적의 예봉을 꺾지 못한 채 중단되고 제2차 공격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상당수의 전상자들이 후방으로 수송되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군 및 연합군의 서울 입성을 위한 전 지역 전투 중, 이곳의 전투가 진격군으로서 가장 큰 손실을 입었으며 또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된 전투였다.
1차 공격을 시작한 지 꼭 12시간 만에 2차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1차 공격 때 그처럼 버티던 적의 저항이 너무도 손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진격군들은 초조한 진격을 해야 했다. 방금이라도 무슨 복병전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적의 그처럼 막강한 저항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약화되었는지는 연희고지를 점령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의 1차 공격에서 적은 의외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겁에 질린 것이다. 고지 상봉에는 적의 시체가 1천 명을 넘었다. 그리고 포로들은 일부 병력이 104 고지에 진을 쳤으며 나머지는 시가전을 각오하고 마포와 용산 방면으로 도주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안 되는 104 고지의 적은 우리의 공격이 시작되자 곧 도주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