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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Nov 16. 2022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

<나를 알아가는 글쓰기>

마흔이 넘었음에도 나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친구가 많지도 않거니와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도 못한다. 이십 대 때 가장 힘들었던 건 깊은 우울함보다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외로움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따돌림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네 살 때 돌아가시고 2년 정도 시골에서 살다와서 누가 봐도 촌티가 흐르긴 했다. 게다가 엄마는 내 머리를 뽀글뽀글 볶아버리셨고 오빠는 볼 때마다 양배추 머리라고 놀렸는데 내가 봐도 양배추 인형의 머리와 똑 닮았었다. 그리고 엄마 말씀으로는 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유치원에 갔다고 하니 평범한 아이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유치원 졸업사진은 언제 봐도 좀 무섭다. 쌍꺼풀 없이 날카롭게 찢어진 눈과 귀염성 없는 이목구비에 무뚝뚝한 표정.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었지만, 표현할 줄도 모르고 애교스러운 성격도 아니어서 주변을 맴돌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는 아빠가 없다며 대놓고 따돌림을 당했고, 중학교 때는 친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것이 큰 상처로 남았다. 지금 가장 친한 친구들은 고등학교 친구들인데, 처음 그 친구들과 어울릴 때 나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친구들이 좋아할 모습으로 나를 포장했으며 깊은 속마음을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한 번씩 독한 말을 내뱉을 때마다 친구들의 반응이 좋았기에 그 모습이 곧 내가 되었다. 다소 냉소적인 면이 있긴 했지만, 점점 더 내가 아닌 내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속으로는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면을 쓴 모습으로 친구들 옆을 지켰다.


지금까지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편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자꾸 친구들 눈치를 보며 다수의 의견을 따르고 마음 상한 것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친구들 잘못이 아닌 나의 문제다. 내가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메뉴 같은 걸 정하는 사소한 것도 의식적으로 나의 의견을 피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친구들은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에 그것조차 눈치를 보며 선택을 양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 친구는 나에게 “너의 매력을 모르겠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당황했고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 말에 이렇다 할 의견을 내지 않았고, 나 조차도 나의 매력을 알 수 없었기에.

난 내가 개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건 우울증밖에 없는 듯 보였다. 뚜렷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기주장이 명확하지도 않았으며  말을 똑 부러지게 잘하지도 못했다. 그저 술 좋아하는 우울한 친구. 그것이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금에 와서 나는 내가 개성이 뚜렷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톡톡 튀는 개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개성 말이다.

혼자 캠핑을 가보고 싶다는 말에 친구는 왜 혼자가냐고 물었다. 연초에 혼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친구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쳐다봤었다.

난 혼자 있는 시간에서 자유를 느끼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의 두려움에서 온 자기 보호적 성향일 수도 있겠다. 어차피 사람들 만나는 것을 힘들어하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는지도.


그렇다고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지금 나에겐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글을 쓰는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책 얘기를 하면 따분하다고 생각할 것 같고, 잘난 척하는 것 같이 보일 것 같아서 꺼려진다. 그렇다고 깊이 있게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은 또 부담스럽다. 그러기에는 나의 수양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을 공유하는 건 더더욱 힘들다. 너무 깊은 내면의 글이라 지인들에게 보여주면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 것 같다. 나의 내면을 다 보여주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이해받지 못할 것 같고 공감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그럼에도 나는 함께 책 이야기를 하고 나의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꿈꾼다.


나는 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걸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많이 너그러워지고 마음이 편해져서 사람들 대하는 것이 마냥 어렵지만은 않다. 하지만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쉬운데 대화가 끊기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할 때가 많다. 대화가 끊긴 것이 나의 잘못 같고 그것을 빨리 해결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든다.

사람을 마주 하면서도 이러하니 전화통화로 대화를 하는 것은 나에게 공포 그 자체다. 눈치를 살펴야 하는데 표정을 볼 수 없는 전화는 엄청난 불안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남편에게도 친정엄마에게도 용건 없이는 전화를 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전화로 돈독해질 수 있는 수단은 차단 상태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전화번호를 주고받는다 해도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며 상대방에게 전화가 오면 긴장감에 심장이 쿵쾅거릴 것이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알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전화를 하지 않는다. 집이 멀어서 자주 보기도 힘든데 전화통화도 하지 않으니 알고 지내온 시간만큼 서로를 잘 알지는 못한다.

만남은 또 어떠한가. 만나고 싶은 마음에 덜컥 약속을 잡아놓고 약속 날짜가 다가오면 부담감에 압도당하고 만다. 이십 대 때는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번번이 약속을 펑크 내 친구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친절하고 밝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을 믿을 수 없어 적대적이었던 이십 대 때와 달리 지금은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다. 먼저 밝게 인사하면 상대방 또한 기분 좋게 받아준다. 특히 아이를 키우며 만나고 부딪히는 엄마들은 서로에게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서 대화를 하기가 편하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갇혀 지내던 내가 그나마 아이를 키우며 세상 밖으로 한발 내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이 이야기 말고는 속 깊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금주 후에 아들 친구 엄마들과 저녁을 먹은 적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분들은 술을 좋아하셨다. 예전의 내가 그랬듯 술을 마시지 않는 내가 불편했으리라. 너무나 성격 좋고 진솔한 분들이었는데 그 이후로 만남이 이어지진 않았다. 물론, 술 때문만은 아니라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하는 나의 소극적인 성격 탓도 있을 테지.


혼자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면서도 소통은 하고 싶다. 나의 성격이나 태도를 보면 지극히 앞뒤가 맞지 않는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희망을 버리진 않고 있다. 언젠가는 나 같은 사람이나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수영장에서 6개월 같이 수영을 한 분과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아이 친구 할머니와 운전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흥분하는 나를 보면 사람들과 이어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만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금씩이라도 다가가려 애쓰는 걸 보며 희망을 느낀다.

아무리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다른 사람과의 소통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제는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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