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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Dec 01. 2022

만족을 느끼는 행복

<나를 알아가는 글쓰기>

어린 시절에는 가난이 창피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언덕 위에 있었는데, 그 언덕을 올라가기 위해선 우리 집을 지나야 했다. 지하계단을 올라 가면 등교하는 학생들과 마주쳐야 했고, 하교할 땐 어둡고 좁은 지하로 내려가는 등을 보여줘야 했다. 그때는 그것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등하교 때마다 매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이른 아침에 등교하거나 친구들과 논다는 핑계로 하교 시간을 피해 집에 들어갔다. 물려받은 교복은 친구들의 새 교복과 언뜻 같아 보였지만 더 푸른빛이 돌고 오래 입어 엉덩이가 반들반들했다. 교복은 나의 가난을 더 돋보이게 했고, 사춘기 시절의 소녀는 그것이 못내 수치스러웠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시절, 그럼에도 내가 신께 빈 것은 부가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것은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아득하여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행복한 집’이었다. 갈 곳은 집 밖에 없었는데 집은 나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집에는 몸 누일 곳은 있지만, 마음 한편 기댈 곳이 없었다.


지금 우리 집은 나에게 가장 안전하고 편한 곳이다. 어린 시절보다 가난하지 않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족들이 있다. 평범한 것이지만 나는 가질 수 없던 것을 아들에게 줄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어느 곳보다 집에서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는 아들들을 통해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어린 날들을 보상받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내가 원하던 것은 이미 모두 얻었다. 하지만 난 지금 더 많은 것을 갖길 원한다. 나만의 차,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생필품이 되어버린 것들과  새로운 옷에서부터 양말, 책까지.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


한때 나는 쇼핑중독이었다. 명품이나 비싼 물건을 사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계속 사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도 사도 또 사고 싶은 새로운 것들이 생겼다. 특히 옷에 대한 집착이 심했는데, 철마다 새로운 옷을 사야 외출할 마음이 생겼고,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약속이 잡히면 인터넷 쇼핑몰부터 뒤졌다. 새로운 것을 입어줘야 자신감이 생겼고, 나도 새것처럼 빛날 것 같았다. 유행에 뒤처지기 싫었고, 초라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세울 것이 없으니 외모라도 깔끔하고 멋들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찮은 몸부림에 불과했다.


요즘도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그 옷은 나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고, 나의 내면을 보여줄 수 없다. 그저 깔끔하고 나에게 잘 어울리는 편한 옷을 입으면 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허영심이 날 귀찮게 조르기도 한다. 멋진 옷을 입으면 원래의 나를 좀 더 세련되고 우아하게 만들어줄 거라며. 날씬한 몸이 나를 완벽하게 해 줄 거라는 착각처럼 옷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많은 옷을 사 봐서 입고 싶지만 어울리지 않는 옷과 사고 싶지만 몇 번 입지 않을 옷들을 가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 다고 만족감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결제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것은 관심 밖의 것이 된다. 이미 내 것이 되었으므로.


나는 어릴 때부터 식탐도 대단했다. 남자 형제들 사이에 껴 있다 보니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고, 맛있는 것이 있으면 숨겨놓기 바빴다. 맛있는 것을 아끼며 마지막에 먹는 습관도 식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맛있는 것부터 먹으면 먹을 때마다 제일 맛있는 것을 먹게 된다는 말을 듣고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는다. 제일 맛있는 부분을 가장 따뜻할 때 먹고, 아쉬워하며 꼬리를 먹지만 꼬리도 그것 나름대로 바삭하고 담백하다. 제일 맛있는 것을 먼저 먹어버리면 가장 큰 행복도 함께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맛있는 것을 아끼고 아끼며 나중에 먹었는데 어차피 행복은 먼저 오나 늦게 오나 금방 사라져 버린다. 행복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시간과 먼저 행복을 누리며 아쉬워하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과 아쉬워하는 시간을 빼면 행복을 누린 시간은 비슷하리라.


만족감을 모르는 끝없는 탐욕. 그것은 언제쯤 채워질까?


부를 많이 축적하고도 더 큰 부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그들에게는 그것이 내가 더 좋은 집에 살고 싶고, 나만의 차를 갖고 싶은 것처럼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넘치는 부를 갖고도 더 큰 부를 갖기 위해 욕심부리는 사람들을 탐욕스럽다 욕하지만, 나보다 덜 가진 사람이 나를 보면 나 또한 탐욕스러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없고, 욕심은 끝이 없기에 스스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욕심의 끝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끝없는 욕심에 행복은 자꾸만 뒤로 밀려날 뿐이다.


마흔이 넘으니 비로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 와닿는다.

내가 나이 듦을 두려워할 새 없이 아들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세상을 거울보다 투명하게 담아내고, 봄날 햇살처럼 맑게 빛나던 까만 눈동자와 해맑은 순수함을 자아내던 세 살의 아들을 그리워하듯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말하는 초등학생 아들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그리워질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사람보다 나이를 빨리 먹는 고양이 봄이. 솜털을 바짝 세우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집안 곳곳을 탐색하던 아깽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익숙한 듯 온 집안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늘어지게 잘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여럿 만들어 놓은 어엿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에 달궈진 테라스를 밟고 돌아다니다가 더위에 넋이 나간 듯 입을 다물지 못해 강제로 끌려 나와야 했고, 첫눈을 보고 강아지처럼 좋다고 뛰어다니던(아마도 발이 너무 차가워 뛰어다녔겠지만) 봄이의 천방지축 아깽이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어떤 경계심도 없이 다리를 쩍 벌린 채 벌러덩 드러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모습도 너무 사랑스럽다. 그것이 꼭 나를, 우리 가족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고 온 몸으로 말하는 것만 같다.

쑥쑥 커버리는 아들들과 봄이를 보면 나에게서 떠나갈 날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행복을 기다리고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누군가에는 갖지 못할 영원의 꿈일 수 있기에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잊지 않으려 한다.

끝없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면 작은 것에 만족할 수 있고, 기다렸다는 듯 행복이 평범한 하루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편히 쉴 집이 있고, 건강하게 잘 자라 주는 아들들이 있고, 내 옆에서 몸을 돌돌 말고 세상 평온하게 잠든 봄이가 있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보다 더 만족스럽고 행복한 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행복이기에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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