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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Dec 08. 2022

마음속 아빠의 공간

<나를 알아가는 글쓰기>

사실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는 욕구는 강했지만 아빠에 대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기억에 없었고, 아빠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를 헤아려보다 내가 그 나이를 이미 한참 지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셨던 당시 아빠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젊은 나이다. 그런데 나는 아빠보다 아홉 살 어린 엄마를 생각하며 ‘어떻게 그리도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처절한 고통 속에서 우리 남매를 키웠을까’란 생각만 했지 아빠의 짧디 짧은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난 한 번도 ‘아빠’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자연스럽게, 어쩌면 의도적으로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는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아빠’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좋았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말든 ‘아빠’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쓴 덕분에 지금은 고치고 싶어도 고쳐지지 않는 입버릇이 되었다. 하지만 원 없이 ‘아빠’라는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그 단어는 여전히 공허하게 주위를 맴돌 뿐 내 마음에 자리잡지는 못했다.

사춘기 시절에는 그 ‘아빠’라는 단어를 쓰고 싶은 갈망을 참지 못해 새아빠에게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가까스로 억누를 수 있었다. ‘아빠’라는 말을 새아빠에게 썼다면 그 이름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나에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아빠’라는 단어만으로도 이렇게 아련한 그리움이 들지도 않았을 테고.


나에게 중년의 남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엄마를 때리던 새아빠가 덩치가 크고 뚱뚱한 사람이었기에 뚱뚱한 남자들도 싫어했다. 엄마는 사위가 너무 마른 것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여지없는 마땅한 선택이었다.

뚱뚱한 남자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게 해 준 건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워낙에 먹방을 좋아해서 ‘맛있는 녀석들’에 빠져있었는데 나오는 분들이 모두 귀엽고 재밌고 순수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도 어느덧 중년이었다. 중년의 나이는 이제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체감하며 마주해야 하는 것이었고, 뚱뚱한 남자들이 모두 포악하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빠는 결벽증이 심해서 엄마가 엄청 피곤하셨다고 한다. 과자 하나를 먹을라 쳐도 옆에서 청소할 준비를 하고 계셨고 오빠와 내가 쓸 물건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쓰셨단다. 내가 손 씻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리라.

그리고 믿고 싶지 않지만 아빠도 엄마에게 폭력을 쓰셨다고 했다. 친아빠가 엄마를 폭행하는 것과 새아빠가 엄마를 폭행하는 것에 공포스러운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어느 쪽이 더 큰 상처로 남았을까? 친아빠였다면 한 번쯤은 강하게 막아설 수 있지 않았을까? 아빠가 날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만 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엄마를 외면하진 않았을 것 같다.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을 보며 동생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아빠에 대한 원망 못지않게 엄마에 대한 미움도 크다는 것을 안다. 난 엄마만 이해하려 애쓰면 됐지만, 동생은 아빠와 엄마 두 사람을 이해해야 하므로 나보다 더 복잡하고 힘들 것 같다. 엄마에게 틱틱거리며 짜증을 내는 동생을 보니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가 안쓰럽고 불쌍하다. 예순이 넘었지만 아직도 엄마는 마음 편히 살지 못한다. 언제쯤 엄마는 자식들에 대한 희생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언제쯤 엄마는 엄마의 삶을 이해받을 수 있을까?


아빠의 폭행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 엄마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엄마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처럼 아빠 또한 그러하였을 거라는 확신(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약속을 친할머니는 전혀 지킬 생각이 없다는 듯 아빠가 돌아가시자마자 우리 가족을 매정하게 내쫓으셨다. 성공하지 못한 아빠를 애정 하지도 않으셨다고 한다)이 들기 때문에 아빠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아빠는 나에게 신성하리만치 먼 미지의 존재이기에 쉽게 미화시킬 수 있었는지도.


돌이켜 보면 나의 이십 대와 삼십 대는 순탄치 않았다. 나에 대한 대책 없는 미움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이십 대를 지나, 받아본 적 없는 따뜻한 관심과 안정된 사랑을 아들들에게 줘야만 했던 삼십 대를 거치고 지금에 이르렀다. 마흔이 넘어서야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고, 엄마의 삶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생겼고, 아빠의 짧은 생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됐다. 왜 그렇게 몸을 방치해서 일찍 돌아가신 거냐며 아빠를 원망하던 시기도 있었는데 죽음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없다는 말이 지금에야 마음에 와닿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낭비되었던 이십 대의 시간들. 그리고 정신없이 지나간 삼십 대. 뭔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열심히 살지 않은 것 같은데 마흔이 넘었다. 앉아서 거저먹은 것 같은 나이가 나의 아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나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해도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생명을 아빠에게 나눠드리고 싶다. 아빠가 최소한 마흔까지만 사셨더라도 이렇게 아빠라는 존재가 새하얀 백지처럼 막막하고 바람을 손에 쥐듯 허무하게 비어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빠가 나의 기억에 남아있었다면 깊은 슬픔과 뻥 뚫려버린 가슴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겠지만.


지금 나의 마음에 아빠라는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움도 슬픔도 미움도 원망도. 나는 그저 이렇게 아빠라는 공간을 텅 비워 놓은 채 영영 팔리지 않고 임대문의 종이만 나부끼는 상가처럼 휑하고 쓸쓸하게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살아갈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들들과 자주 놀아주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아들들에게 아빠가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아프지 않고 지금껏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더라도 오래오래 아이들 곁에 있어주길.


나는 다음 생에도 엄마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엄마, 아빠의 엄마가 돼서 따뜻한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싶다. 딸이 된 엄마, 아들이 된 아빠와 많은 추억을 쌓고 수없이 사랑한다 말하고 싶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사랑해 주고 언제든지 따뜻하게 안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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