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연이 Dec 11. 2022

불안하면 불안한대로

<나를 알아가는 글쓰기>

공포스러운 환경에서 벗어난다고 불안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지옥 같은 집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한 불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아침은 아침대로 밤은 밤대로 두려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오늘의 무기력이 두렵고,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희망 없는 내일이 두려웠다.


어른이 되면 나에게 맞는 직업을 갖거나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쭉쭉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는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제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멀어져 가는 친구들을 보며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발만 동동거렸다. 잘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하고자 하는 일도 없었지만 삶은 계속 이어졌다.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내일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 가득한 수동적인 삶.


누군가는 이십 대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고 많은 경험을 쌓았을 테지만 나는 그 누군가와 비교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어쩌면 이십 대 때 내가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자존감’이라는 녀석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까지 끌어내리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온 마음이 질질 끌려 상처로 뒤덮이고 짓물러 고름이 터지기도 했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나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이십 대는 마치 열정을 쏟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남들을 따라가지 못하면 평생 뒤쳐지게 될 것처럼 불안했는데 돌이켜보면 뭔가를 열정적으로 찾거나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때는 무조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아니면 가치가 없으며 시간 낭비라는 어리석은 생각. 어쩌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의 표상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지금 와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이십 대를 즐기지 못했다는 거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바엔 에라 모르겠다 즐기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니 즐길 권리도 나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던가? 맞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말이 못내 야속했다.


어찌 보면 이십 대에 불안한 것은 당연했다. 친구들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듯 보였지만 흔들리고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불안을 그때는 왜 나만의 고유한 것으로 생각했을까? 남들보다 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므로 더 우울하고 불행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했던가?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올 생각 없이 가만히 누워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며.


물론 그때의 시간들이 모두 쓸데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온 정신을 쏟고 친구들과 비교하며 좌절하고 폭식과 폭음을 반복했던 건 나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지만, 슬픔과 분노를 온몸으로 표출하며 몸 안에 쌓여 있던 독소를 빼내는 과정은 꼭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만큼 잘하는 일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이십 대 때 얻은 직업이 평생직장이 아닐 수도 있고, 나에게 안 맞는다 싶으면 그만둘 수도 있었을 텐데 지레 겁먹고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한심하다. 그렇다고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곱씹을 뿐.


마흔이 넘어서야 글을 쓰고자 하는 용기가 생겼지만, 이것이 내가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중학생 때 엉망인 그림으로 만화를 그려보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림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컸었다. 그때 허접한 만화를 읽어준 친구를 잊지 못한다. 그 친구에게 희망적인 말을 들었던 것도.


내가 좋아하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서 김하나 작가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왜 그때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들었던 그 칭찬이 왜 오랫동안 이렇게 마음에 남아있지? 내가 그 칭찬을 아주 듣고 싶었던 건가?”

좋아하는, 두근거리는 일을 찾고 싶을 때 이 부분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는 말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 친구의 칭찬을(어떤 말을 했는지도 기억 안 나지만 여하튼 긍정적인) 들었던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 말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칭찬이고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썩 잘하는 일이 아닐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거 아닐까? 나머지 반은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다.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닐지라도.


마흔이 넘어도 불안하다. 하지만 이십 대 때의 막막한 불안은 아니다.

지금 눈앞에 가야 할 길이 보이지만, 그 길이 맞는 길인지 수시로 의심이 든다. 나의 양육 방식이 옳은지 잘못된 방식인지 자문하게 되고, 내가 선택한 길이 최선인지 되묻는다.

아이 공부며 놀이, 먹이는 것까지 잘 챙기고 열심인 엄마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해 보인다.

글을 잘 쓰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은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브런치’만 봐도 부드럽고 막힘없는 세련된 글들이 넘쳐난다. 그런 글을 보면 내가 발을 잘못 들인 건 아닌지, 나 같은 사람이 글을 써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일에 대한 불안은 평생 따라다니지 않을까 싶다. 남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한계가 느껴질 때마다 좌절감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열심히 해보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 않으면 더 불안하고 평생의 후회로 남을 테니. 죽을 때가 돼서 해보지 못한 일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 먼 훗날 마흔을 돌아봤을 때 도전해보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토닥일 수 있기를.


이십 대를 떠올리며 즐기기라도 할 걸 후회하듯이 불안한 마음을 끌어안고서라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아이들은 알아서 쑥쑥 자랄 테고 내일이면 멋진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작가의 이전글 마음속 아빠의 공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