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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이 Sep 14. 2023

스물다섯, 폭식증 그리고 우울증 #8

수영장과 바다

수영장 모퉁이를 응시해 본다. 넘칠 듯 말 듯하게 물이 넘실거린다. 그러다 어떠한 것이 물의 표면을 건드리면, 물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때로는 동심원을 그리며, 때로는 파도처럼 일렁이며.


 폭세틴캡슐 20mg 두 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초록색 알약을 삼킨다. 공복에 먹으면 속이 조금 쓰리긴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내가 우울해질 가능성을 줄이고 싶다. 고작 약 두 알이 내 하루를 좌우하는 것 만 같다. 덤벙거리는 내가 매일 이렇게 약을 챙겨 먹어 온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만큼 ‘일상’이 내게는 간절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처럼, 그저 평범한 하루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다. 밤새 폭식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맞이하는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나 자신이 미웠다. 퉁퉁한 모습으로 나가기 싫어 집에서 누워만 있던 내가 떠오른다. 끔찍이도 싫은 그 기분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찰랑이는 물은 크게 물결치기도 한다. 작은 자극에는 아주 작은 동심원들이, 커다란 자극에는 물보라가 인다.


 나의 심리적 상태를 수영장에 비교해 보자. 늘 넘칠듯한 수영장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른 이의 수영장에는 몇몇 동심원만 그리고 사라질 작은 낙엽 한 장은, 내가 한아름 안아도 안기지 않는 커다란 나무로 뒤바뀌어 첨벙 던져진다. 별것 아닌 것이 이토록 대단한 것이 되어 나의 수영장을 요동치게 한다. 다시 고요함을 찾기까지는 다른 이의 것에 비해 두 배, 혹은 세배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물보라가 일렁임이 되고, 일렁임이 찰랑임이 될 때까지. 그러나, 잔잔해지던 찰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표면을 건드리면, 또다시 커다란 파동이 시작된다. 그 무언가는 늘,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나에겐 모든 것이 무서웠다. 작은 무언가에도 크게 반응할 것을 아니까.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 무너질지 몰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두려웠다. 항우울제는 나의 이런 두려움을 줄여주었다. 항우울제를 복용한 후 복잡한 생각을 덜 하고 조금은 멍하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감정에 휩쓸려 폭식을 하는 경우도 줄었다. 하지만 내가 내딛는 발걸음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다. 혹시 다시 나의 수영장에 파도가 치는 것이 아닐까. 나의 고요함을 다시 찾지 못하면 어쩌지.


달의 인력은 우리가 사는 지구의 물을 끌어당긴다. 바람은 물을 이동시킨다. 이로 인해 밀물과 썰물이, 파도가 생긴다. 멈춰 있는 자연물을 없다. 우리가 수영장의 파도를 만들어내듯이.

 비가 내릴 때, 잠자코 있던 수영장은 수많은 파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날씨가 개이면 거짓말처럼 그 동심원들은 자취를 감춘다. 우리 모두의 수영장은 동적이다. 때로는 바람이, 때로는 모래가, 때로는 작은 꽃 한 송이가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정도가 다를 뿐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커다랗게 느껴졌기에, 나의 수영장은 늘 파도가 일었다. 그래도 나의 파도는 언젠가 잠잠해질 것을 안다. 그 순간이 올까, 과연 나의 수영장은 조용히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파도가 물결이 되고, 그 물결이 곤히 자는 아이처럼 침착해질 때가 오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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