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와 꽃다발
민들레의 꽃은 노란색이다. 샛노란 꽃이 지고 나면 솜털을 단 씨앗들이 잔뜩 보인다. 그 하얗고 동그란 모양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상상하는 ‘민들레’의 모습이다. 사람 또한 이와 같은 ‘인상’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어떻게 보일까.
다른 이에게 어떻게 보일까. 모두가 하는 생각일 것이다. TPO에 맞는 옷을 선택하고, 화장을 하며, 아름다운 귀걸이를 하는 것이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미’가 번식의 기준이 되기는 하나, 번식을 벗어난 생존의 관점으로 보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없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 그 기준이 일관되진 않아도 사회적 통념으로 존재하는 미의 기준이 있다. 날씬하고 볼륨감 있는 몸매에 뚜렷한 이목구비. 모두가 강조하는 미의 기준이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을 보고 있자면, 과체중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저체중인 사람을 찾는 게 쉬울 정도로 말이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이와 같은 이미지를 접하고, 미의 기준을 굳혀가게 된다. ‘저만큼 말라야 예쁜 거구나.’ ‘난 저렇지 못한데. 살을 더 빼야겠어.’ ‘내 코는 조금 낮네. 코수술을 고려해 볼까.’ 신데렐라의 구두를 신으려는 언니들처럼, 스스로를 재단하려 하게 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오로지 그 기준에 들기 위해.
아름다운 꽃을 모아 담은 꽃다발. 플로리스트들은 여러 가지 꽃을 조합해서 그들만의 꽃다발을 제작한다. 하지만 과연, 꽃들을 억지로 꺾어 모아놓는다고 하여 그것이 아름답다고 칭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영원할까.
나는 나 자신을 사회적 기준에 끼워 맞추려고 했다. 너무 큰 키가 싫어 움츠리고 다니기도 했고, 커다란 덩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온통 검은 옷만 입고 다니기도 했다. 85kg의 몸무게에서 62kg까지 감량도 해보았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짐을 느꼈다. 나를 아름답다고 칭해주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며, 뚱뚱하다는 소리보다는 키 크고 늘씬 다하는 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되었다. 마치 꽃다발을 완성한 느낌이었다. 장미의 가시를 제거하고 색색으로 물들인 튤립을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마침내 내 꽃다발이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무지하게 달콤한 성취감이라 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운동을 더 하고 먹는 양을 줄였다. 간혹 많이 먹었을 때는 그만큼의 칼로리를 소모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난 이런 강박적인 일상에 중독되었고, 결국은 지치고 말았다.
꽃다발의 꽃이 시드는 속도는 모두 같을까. 어떤 꽃은 급하게 먼저 질 수도 있고, 단 하나의 꽃만이 살아남을 수 도 있다. 우리는 꽃이 상해 가면 꽃다발을 버린다. 누군가는 그 꽃을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어 더 오랜 기간 보관할지도 모른다.
꽃다발의 꽃이 하나, 둘 시드는 것처럼, 나의 완벽한 루틴은 하나 둘 망가져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꽃이 하나 지면 즉시 뽑아 던져버렸다. 완벽한 꽃다발만 보고 싶어서. 그렇게 뽑혀나간 꽃들이 수두룩. 결국 남은 것은 없었다. 얇고 초라한 포장지와 덜렁 달려있는 리본뿐. 이때부터 나의 삶은 마구잡이가 되었다. 눈을 뜨는 시간이 곧 아침이고, 식사시간은 깨어있는 시간 전부가 되었다. 마음의 허기짐을 입에 무언가를 넣는 행위로 채워 넣었다. 이 습관은 지금까지도 똑같다. 무언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방에 몰래 숨어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이 행동이 끝나고 나의 책상을 보면 끔찍한 쓰레기들만 가득하다. 내가 짐승처럼 느껴지고, 나를 더욱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지금이 전보다 나은 것은, 꽃을 뽑고 꽃다발을 버리기보다는, 뽑은 꽃을 잘 말려 보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꽃이 다 마르면 다시 꽃다발을 만든다. 그리고 또다시 가꿈의 시작이다.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잠시 멈추더라도, 절대로 주저 않아 주어진 삶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꽃다발을 다시 만들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래도 그 발버둥은 여전히 꽤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