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많이 희미해진, 누군가는 꼰대의 유산이라고 폄하할지 모를, 그러나 정말 아쉬운, 가정교육의 첫머리는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밥상머리에서 사람 됨됨이와 질서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과 실천이야말로 가정교육의 핵심이라는 공감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밥상머리 교육은 케케묵은 유산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도무지 아침 밥상에 온 가족이 모일 수도 없는 현대사회 아닌가. 누가 누굴 가르치고, 질서를 바로잡을 처지가 되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아빠는 밥술을 뜰 사이도 없이 출근해야 한다. 아이가 밥을 혼자라도 먹고 등교할 수 있도록, 엄마도 서둘러 밥상을 차려놓고 빈속으로 출근길을 서두른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측은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밥상머리 교육의 기나긴 유효 기간도 이 시대에 이르러 종착지에 다다른 모양이다.
밥상머리 교육 말고 밥상 교육을 하면 어떨까? 아침 식탁에 모일 순 없어도, 그래서 애처로운 가족들이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을, 주말이 되었든 언제가 되었든 따로 내곤 하지 않는가. 그래도 가족이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역시 밥 먹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위계나 질서를 따지기엔 아이가 너무 애처롭지 않은가. 밥상머리 교육 말고 밥상 교육. 조금만 생각해보면 밥상교육에서, 인성교육 면이든 건강교육 면이든 엄청난 영양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즈음. 아이는 처음에 입에 단 음식이 좋았을 것이다. 젖을 떼고 난 후, 부드럽고 고소한 음식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가 자라기 시작하면서 보다 딱딱한 음식도 씹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바, 비로소 좀 거친 음식을 먹는 훈련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그러나 입에 좀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만나 단 한 번 만에 도전의식이 꺾이고 만다면, 그로부터 편식이 자리 잡을 수도 있게 된다. 편식은 여러 가지 음식이 지닌 다양한 맛을 늦도록 알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도 있다. 밥상 교육이 주의해야 할 점이다. 그러나 좀 입에 거친 음식이라도 입에 넣는 도전이 있어야 거친 음식에 내포된 영양소를 얻게 될 것이다. 향긋한 구운 김과 달걀프라이, 소시지 식단만으로는 맵싸한 김치에서 얻어지는 섬유소의 유익과 양파, 버섯, 청국장의 위력을 혜택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저것 조금은 맞지 않는 음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맛을 겪어가며, 고루 섭취해 가는 가운데 음식과 영양소에 대한 몸의 수용기(受容器)는 보다 커지지 않을까?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내 응석을 잘 받아주는 친구만을 가까이한다면, 그리하여 내게 장난을 걸어오거나 내 별명을 지어 부르는 친구를 참아내지 못하고 배척한다면, 이는 또한 사교에 있어 편식이 시작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 아이는 어제 다툰 아이에게 선뜻 먼저 말을 건넬 수 있는 아이로 커 갔으면 좋겠다. 내 아이는 친구가 좀 떼를 쓰더라도, 조금 억지를 부리더라도 지그시 용서하고, 봐주고, 배려하며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아이로 자라나면 좋겠다. 좀 거친 아이를 만나서 서로 힘을 겨루고 난 뒤에도 그 아이를 놀이에 끼워줄 줄 아는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
조금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여 그 맛을 수용하듯, 조금은 특별한 성격의 친구와 어울리다 보면 그 친구의 성품도 수용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음식을 맛보다 보면 어떤 음식엔 혀가 조금 매울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부드러운 무 된장국이나 콩나물국 또는 수프를 조금 떠먹으며, 스스로 매운맛을 중화시키곤 한다. 여러 친구들과 사귀면서 때로는 알싸한 생마늘 맛을 내는 독특한 개성의 친구로부터 마음에 작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다행히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로부터 위로를 받거나, '말은 그렇게 해도 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는 아니'라는 정보를 접하게 된다면, 마음의 수용기는 보다 확장되지 않을까? 수용할 수 있는 친구가 많아짐에 따라 점차 아이의 마음 근육이 튼튼해지지 않을까?
다양한 영양소를 지닌, 다양한 음식이 가득한 한식 밥상처럼, 우리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친구들이 가득한 교실에서 지내는 자녀들을 의식해야 한다. 마침내 성인이 되어 다양한 음식을 고루 즐길 줄 알게 된 어른은, 쓰고, 매콤하고, 시고, 짭짤한 맛까지 즐길 줄 알게 되며, 다양한 음식 맛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친구들과 고루 잘 지낼 줄 아는 아이는, 학교에서 다양한 성품의 친구들과 다양한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음식을 고르게 먹는 아이가, 아이들도 고르게 사귈 줄 알게 된다는 연구조사가 있었는지 검토해 본 바는 없다. 그러니 엉뚱한 주장을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아이와 음식을 고루 나누며, 아이의 여러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맛의 음식이 주는 교훈에 견주어가며 어른다운 눈으로 바라보고, 아이가 친구 관계를 긍정적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밥상에 견주어 도와주자는 말이다.
우리의 밥상은 원래부터 단품 음식으로 차려진 밥상이 아니다. 많은 선진국의 셰프들이 내어놓는, 셰프가 주는 대로의 단품 음식을 먹는 밥상이 아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선 셰프의 메인 요리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셰프의 맛을 제공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밥상은, 한 입 밥에 제각각 제멋대로 반찬들을 집어 먹는 까닭에, 맛의 주도권이 셰프가 아니라 먹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백지와 같은 밥(물론 흰쌀밥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그릇이 거느린 여러 가지 음식들, 다양한 반찬들. 우리의 밥상이 그러하므로 우리의 밥상에서 셰프는 자신이 제공하는 맛을 일괄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 밥상에 앉아서도 우리는 각자 다른 반찬으로 다른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약해 본다. 한국인의 창의성의 원천은 바로 이 밥상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숟가락과 젓가락질을 하게 되면서부터, 보다 자유자재로 식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아무도 어느 반찬을 어떻게 조합하여 먹으라는 잔소리가 없다. 각자 입속에 다양한 맛을 조합하며 개성 있는 식사를 한다. 이렇듯 우리의 밥상은 창의성이 구현되는, 제2의 맛의 창조성이 실현되는 장인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 어린 잔소리는 아이가 자유자재로 식사에 참여할 수 있기 전까지만, 음식을 고루 먹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칭찬하고, 격려해주면서 다양한 음식물에 대한 수용기(受容器)를 키워주는 데까지면 될 것이다.
우리의 밥상을 보다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 함께 살아가는 민주시민 역량 교육이 들어있고, 무한 창의력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아이들과 함께 밥을 맛있게 먹어보자.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아이에게 어른의 이야기도 들려주며, 온 가족이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맛있게 먹자.
노을
늦은 저녁에
사탕 하나
빨갛게 녹여드시고
이도 안 닦고
까만 이불
끌어 덮으신다
저러다
이
다 썩겠다
하느님도
엄마가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