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 인생의 전부일까?

by 인해 한광일

아내와 함께 마트를 갈 때마다 나는 힘에 부치는 일을 하러 가는 경운기처럼 아내의 뒤를 툴툴거리며 따르곤 한다. 다른 여자들도 그럴까? 사과를 고르거나 감자를 고를 때도, 양파 한 망을 살 때도 아내는 이리 뒤집어보고, 저리 뒤집어보곤 한다. 고르다가 저 아래에 묻혀 있는 것까지 굳이 꺼내 보고 나서야 처음 위에서 골랐던 그 사과를, 그 양파를 카트에 싣곤 한다.


그럴 때마다 '당신이 장사하는 사람이라도 그렇지 않겠어? 사람들 눈에 띄라고 제일 좋은 걸 위에 놓을 거잖아. 여기 상품들도 다 그래. 위에 있는 게 제일 좋은 거라고.' 하고 핀잔을 준다. '그건 나도 알아' 아내는 언제나 내게 동의하면서도 장에서 물건 고를 때의 그 습관을 절대로 고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나는 상인들이 물건 진열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실은 매대에 매달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내처럼 쌓인 물건을 들어내고 들춰보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골랐건만 사과를 깎거나 양파를 다듬을 때, 썩거나 흠이 난 부분을 발견하면, 아내는 또 인상을 진하게 찌푸리곤 한다. 그렇다고 내 방식의 물건 고르기가 실패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내의 심부름으로 다녀온 내 장 봐 온 솜씨에 대해서도 아내는 나의 '물건 고르는 눈 없음'을 곧잘 핀잔하곤 한다. 아내의 심부름 끝에 칭찬받은 일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내 물건 고르기 솜씨도 별 볼일 없는가 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바로 제대로 된 물건 고르는 일이지 싶다.


우리의 인생이란 어쩌면 이렇듯 매사에 무언가를 골라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부모, 고향, 조국 등 이미 운명 지워진 것들을 예외로 하고 말이다. 눈에 확연히 띄는 결점이 보인다면야 물건 고르는 일이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색깔로는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 물건인데, 크기도 모양도 같은데, 색깔이 조금 다른 사과를 우리는 어떻게 고를 것인가? 크기가 비슷해 보이는데 색상만 조금 다른 사과는 어느 쪽이 더 당도가 높은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쩌면 과학 세상이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러한 문제도 쉽게 해결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전엔 우리는 여전히 선택의 갈등을 겪어야 한다. 결국 돈을 지불하고 집에 가져가서 잘 씻어 깎아 먹어봐야 알게 될 일이다. 어느 정도 당도 높은 수박을 고르는 요령처럼 사과 고르는 요령, 양파 고르는 요령, 호박, 오이 고르는 요령도 정리되어 제시된다면 장보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입이 알아야 할 일을 눈이 보는 대로만 고를 뿐이다.


그러니 사람을 고르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들까?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맛을 보기도 어려운 일 아닌가? 사람 고르는 일이야말로 아내의 장 보는 습관을 따라야 할 것 같다. 겉보기로만 고를 순 없는 노릇이다. 겉보기로만 좋은 사람일 것이다, 무서운 사람일 것이다, 판단할 순 없는 노릇이다. 옛 어른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러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을까? 결국 그래서 조상들의 선택은 그나마 많이 골라 본(?) 어른들의 눈이 고집되었나 보다. 그러니 예전엔 부모의 눈으로 자식의 배필을 정해 주어 신랑의, 신부의 얼굴도 모르고 혼인을 하게 되었다지 않는가. 그러나 혼기의 그들은 그것이 속상했나 보다. 자기 삶의 중심을 남(?)의 선택에 맡긴다는 건 아무래도 기막힌 일이긴 하다.


그래서 지금은 스스로 신랑짜리나 신붓감을 고르라고 부모들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완전히 선택권을 양도받은 현대인이다. 그러나 선택권이 곧 좋은 선택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선택에 대한 혜안(慧眼)을 갖추기도 전에 우리는 겉보기만으로 너무 이른 선택의 후유증을 겪기도 한다. 다행히 누구는 제대로 된 선택으로 행복한 젊음을 누리기도 하지만, 또 누구는 자신의 보는 눈 없음에 가슴을 치며 자조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잘못된 선택을 포기하고 다시 고르러 나서기도 하는 게 요즘 우리네 모습이 아닌가 한다. 다시 골랐으나 또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선택하고 포기하고, 다시 선택하기를 되풀이하기도 한다.


‘그놈이 그놈’이다.

결국 옛날 조상들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곤 한다. 좋은 사람 고르는 일이 잘 익은 수박 고르는 일처럼 진정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가 보다. 결혼 연령이 자꾸만 뒤로 늦춰진단다. 하긴 사람 선택하는 일이 예삿일인가. 한 번 잘못 선택하여 꼬인 인생을 살지 않으려 조심에 조심을 더하는 것도 만혼의 한 이유일 것이다. 청춘들이 두꺼운 책을 읽듯, 한 길이나 되는 사람 책을 정독하느라 시간이 걸리는가 보다.


선택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이 서는 것일 것이다. 선택만이 아니라 선택한 바를 가꾸고 선택한 자신을 가꿈으로써, 그를 훌륭하게 성장시키고 자신의 그릇이 커져, 여유롭고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는지. 좋은 사람을 고르는 방법의 하나가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의견에 조심스럽게 동의한다.


딸아이가 핀잔을 먹은 내 심부름 보따리를 아내에게서 넘겨받으며, 오늘은 둘 다 수고가 많았으니 자신의 요리를 맛 보이겠단다. 조금 썩은 데가 있는 양파를 도려내고, 울퉁불퉁한 감자를 깎고 나박나박 칼질을 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피망과 양파와 버섯과 감자를 넣어 볶는 소리가 요란하다. 냉장고가 여러 번 열리고 닫히곤 한다. 이윽고 딸아이가 부른 식탁 위에는 근사한 요리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내의 입이 떡 벌어지며 감탄하는 얼굴엔, 내가 잘못 본 장에 대한 불만은 그림자조차 없다. 딸아이 때문에 훌륭하게 펼쳐진 저녁상이다. 딸아이 덕분에 내 잘못된 선택은 이렇게 지워졌나 보다.







기다리기


누굴 기다린다면

나무들만큼은

기다려 봐야지


들녘에

길가에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줄 아는

저 나무들

집 나온 지

수십 년은 되었을 거야



눈 밝은 낮엔 저렇게

발아래 검은 보따리 내려놓고

왜 아니 올까, 약속한 님은?

어디만큼 왔을까, 야속한 님은?

번잡한 생각 떨치느라

우수수 치머릴 떨기도 하지만



밤이면 다시

검은 보따리 들쳐 이고

가자, 어서 가자. 숲으로 가자.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달의 손목을 부여잡고

안달을 하지


결국

새벽이면 또

나무들은

한 발짝도 못 떠난 채

처진 어깨로 시름에 젖어

우두망찰 넋 나간 채 울음을 참지


그의 손목을 놓치고 떠날 수 없어

다시 발밑에

검은 보따리를 내려놓고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발설한 적 없는

그를 찾아 두리번대며 한낮을 지내는 거지

그렇게 다시

수십 년을 기다려 보는 거지


누굴 기다린다면

나무들만큼은 기다려 보는 거지.

말면 말겠지만

기다린다면

사랑 한 번 오지게

기다려 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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