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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 Aug 13. 2022

시댁 식구들이 놀러왔다.

그것도 일주일이나


 아침 8시에 일어나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한 바가지 하고 묵은 빨래를 세 번쯤 돌리고 나서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겨우 만들어 소파에 앉아 숨을 돌렸다. 지난 한 주는 그야말로 전쟁같은 1주일이었다. 미국에서 시댁 식구들이 여행을 왔기 때문이다. 시부모님들에게 이번 여행은 두 번째 한국 방문이고, 시동생에게는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늘 미국에서만 만나던 시댁 식구들을 내 나라인 한국에서 만난다고 하니 왠지 모를 책임감과 부담감이 밀려왔다. 남편은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러겠는가.


 시댁 식구들이 여행 온 동안 5일 연차를 낼 거라고 하니, 친구들은 ‘시댁 식구들과 1박 2일도 아니고 1주일이라니..!' 라며 중간에 하루 이틀은 꼭 회사에 나가서 쉬라(?)고 조언했다. 당연히 여행 내내 가족들과 함께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해서 중간에 하루는 출근을 하기로 했는데, 결론적으로 친구들의 말이 맞았다.


 여행 첫째 날과 둘째 날, 시부모님과 시동생, 남편을 데리고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역대급 더위와 장대비를 동반한 습한 날씨 속을 쏘다니고 보니, 그토록 지겹고 삭막했던,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평소라면 주말내내 집에서 빈둥대다 회사가기 싫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출근했을 나인데, 주말 이틀간의 투어를 마치고 월요일 아침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어찌나 마음이 편안해지던지. 이래서 워킹맘들이 차라리 출근하는 게 낫다고 하는 거구나, 워킹맘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며 에어컨 빠방한 사무실에서 재충전(?)하는 동안 남편은 나 없이 홀로 가이드를 전담했고, 결국 그날 밤 뻗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 다음 날은 쉬어가는 날로 하고, 모두가 우리 집에 모여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카드게임을 하거나 넷플릭스를 보며 빈둥거렸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긴장되는 이벤트는 바로 상견례였다. 코로나 탓에 양가 부모님들은 아직까지 한 번도 실제로 대면한 적이 없었는데, 한국까지 직접 오셨으니 한 번은 봬야 되지 않겠냐는 엄마의 말에 만남이 성사되었다. 사실 엄마도 영어를 못하시고 시부모님도 한국말을 전혀 못하셔서, 모든 대화를 딸인 나를 통해 해야 하는 이 기묘하고도 불편한 상견례가 그렇게 부담될 수가 없었다. 보통의 상견례에서는 자식들은 가만히 있고 부모님들끼리만 대화를 나눈다는데, 영어도 그리 잘 하지 못하는 내가 양가 부모님 사이에 껴서 통역을 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어색하고 피곤한 이 자리가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부모님들도 나를 배려하셨는지(본인들도 어색하셔서 그런건지) 가볍게 까페에서 차만 마시기로 했다.


 상견례라고는 해도 우리는 이미 결혼해서 잘 살고 있으니 예단이며, 혼수며, 신혼집 같은 얘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할 얘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양가 부모님 모두 고향이 옥수수가 유명한 지역이라, 난 어렸을 때 옥수수를 많이 먹었다, 나는 옥수수 수염으로 머리 땋고 놀았다, 나는 마른 옥수수로 등을 긁기도 했다는 등을 이야기 하며 긴장된 분위기가 풀어졌다. 자연스럽게 나와 남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고, 엄마는 시부모님들에게 며느리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보았다. 통역을 하면서도 어떤 대답이 나올까 두근거렸는데, 두 분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보들이는 우리가 늘 가지고 싶었던, 꿈꿔왔던 딸이에요! 라고 말씀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극찬에 나도 엄마도 마음이 찌르르 해졌다.


 엄마는, 사실 한국에서 상견례라고 하면, 양측 부모님이 내숭 떨며 조용히 밥만 먹고 헤어지는 자리고, 은근히 아들 가진 부모가 딸 가진 부모 앞에서 으스대는 자리라며 한국의 상견례 문화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굳이 여기서 남존여비에 대해서까지 얘기해야 되나… 싶기도 했지만 말을 지어낼 수는 없으니 그대로 통역했다. 시부모님들은 미국에서는 그런 일은 전혀 없고 오히려 결혼식에서 신랑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고 신부가 1순위여서, 모든 것이 신부의 취향에 맞춰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1시간 남짓한 티타임동안 양가 부모님들은 의외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셨고, 엄마들끼리는 얼싸 안고 셀카까지 찍고 헤어지셨다. 상견례인지 동창회인지 모를 자리가 끝나고 엄마는 내게 말했다.


“꼭 오래된 친구들 만나고 온 것 같다, 얘.”


엄마를 배웅하고 오자 시어머니가 말했다.


“Your mom is so cute.”


 상견례가 끝나고나니 큰 산을 하나 넘은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역대급 날씨탓에 몸이 힘들기는 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신나게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새삼 느꼈지만 서울은 정말 멋지고 재미있는 도시다. 몇몇 사람들은 서울에서 1주일이나 뭐 할 게 있냐, 제주도라도 가야 되는거 아니냐 말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1주일 동안 지겨울 틈 없이 알차게 서울을 즐겼다. 어디든 걸어서, 혹은 대중교통으로 쉽고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고 온 천지가 맛집이며(팁도 내지 않아도 된다…!) 도심 속에서 등산도 즐길 수 있는, 잘만 찾아보면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전시, 체험 프로그램도 넘쳐나서 전통주 시음 체험이나 국립 박물관같은 고퀄리티 전시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도시는 그리 많지 않다.


 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시부모님들과의 여행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시부모님들이기는 하지만 두 분 다 연세가 젊은 편이라 내 또래가 노는 방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음식과 맥주만 있으면 어디든 오케이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여행의 마지막 밤, 남편이 ‘이제 내일이면 다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네, 시원섭섭하다’ 라고 말했다. ‘시원’섭섭이라고 말하는걸 보니 남편도 어지간히 피곤했나보다. 신기한건 나 또한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는거다. 나는 그냥 시원한 마음만 들 줄 알았는데, 내심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역시나 공항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시어머니를 끌어안고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다음에는 중간에서 만나요! 하와이? 독일?!”


시어머니는 눈물을 멈추고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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