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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 Sep 07. 2024

안전의 이름으로

 내가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밤 11시쯤 집에 온 일로 너무 늦게 다닌다고 심각하게 화내는 남편과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이내 거리에서, 남편도 누군지 다 아는 동네 엄마들과 노는데, 본인은 그 시간에 친구 만나러 나가기도 하면서 나에게만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아닌 척 하지만 나를 통제하려 드는 것으로 보였다. 

 현실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겪을 수 있는 위험의 확률이 다르고, 밤에 다니는 건 위험하다는, 안전이라는 대전제가 문제다. 반박이 불가한(최소한, 화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안전문제 앞에서 나에게 이런 사적인 약속이 극히 드문 일이라든지, 어디 번화가에 간 게 아니라 우리 동네 호프집이었다든지, 나는 원래 맥주 2잔도 안 마시는 사람이라 정신이 아주 쌩쌩하다든지 그런 건 다 소용이 없다. 


 '위험해서 안돼.'

 이 말은 얼마나 위험한지. 물론 세상에는 실제로 '위험해서 안 되는' 일들이 대단히 많고 조심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밤 11시에 집 근처 호프집에서 놀다가 같은 단지 사람들 다섯 명이 함께 귀가하는 게 위험하다면 나는 평생 '남성 보호자' 없이는 그 시간에 다니면 안 된다는 말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차라리 방을 하나 잡아서 1박을 하고 놀면 괜찮다는데, 맞벌이하며 애 키우는 사람이 친구랑 1박 약속을 잡는 건 얼마나 많은 운과 때가 맞아야 하는지. 친구를 만나지 말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만약 밤 11시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의 안전과 위험이 이 정도로 심각하게 실존적인 문제라면, 왜 입법부와 사법부는 강도폭행강간 등의 범죄에 대해서 죄다 무기징역으로 형을 설정하고 판결을 부과하지 않는 것인가?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잠재적인 폭력의 가능성  때문에 일상적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길에 껌만 뱉어도 잡혀 들어가는 체제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종류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게 낫지 않나?


 이 일을 곱씹다가 문득 내가 아이에게 들이대는 안전이라는 도그마에 대해 생각이 뻗어나갔다. 

 아이에게 굉장히 자주 '그건 위험해서 안돼'라는 말을 하게 된다. 돌봄교실에 안 가고 집에 혼자 있고 싶다는 아이에게 그건 위험해서 안돼, 자기 혼자 계란 후라이를 해보고 싶다고 해도 그건 위험해서 안돼, 밤에 심부름을 가보고 싶다고 해도 그건 위험해서 안돼 등등.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수많은 '안돼'에 둘러싸여 있다가 이 아이는 언제 갑자기 세상을 대면하게 되는 걸까. 그게 그냥 나이로 정해지는 것 같다. 이제 고학년이니 혼자 다녀도 되지,라는 식으로. 

 가급적 아이가 크게 다치는 일이 없도록 나의 통제력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최대한 안전하게, 막아야 할 행동은 막는 것이긴 한데 아이가 수많은 상황에서 자유를 제한당하다 보니 뭐가 위험한지 스스로 판단하는 감이 없는 것 같다. 대낮에 '지금은 자전거 타도 돼?'라고 물어보는 것은 과연 이 나이에 맞는 질문일까? 본인의 판단력이 무르익을 때까지는 부모가 하나하나 제한하거나 승인하는 게 맞는 일일까.

 최근에 읽은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에서는 현대 사회의 양육방식이 아이들의 자율적인 놀이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으며, 이를 집중력 저하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보았다. 지금 어른들이 어린이였을 때 너무나 당연했던 자율적인 놀이-모험과 탐구-가 지금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극히 제한되는데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이 폭력의 위험이 훨씬 낮다는 걸 생각할 때 이는 온당치 않다는 것이었다.

 현시대의 아이들에게 자유롭고 자율적인 놀이의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이 내 어린 시절보다 폭력이 적은 사회인지 확신이 서지 않고, 통계적으로는 더 안전한 사회일지라도 그 적은 확률의 위험이 내 아이에게 닥친다면 통계가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미국-총기난사가 하루에 1.5건씩 일어나는 나라-에 사는 부모들이 아이가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는 일에 경기를 일으키는 건 너무 자연스럽지 않나? 위험에 예민한 걸 탓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위험해서 안된다는 말이 범람하는 게 위험하다는 것도 안다. 


 아이가 친구들과 야구를 하면 공이 단단해서 위험하니 스펀지공으로 해라, 친구들이랑 놀 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지 말아라, 자전거는 이 길에서만 타라, 등등. 나도 어릴 땐 놀이터에서 정글짐에 거꾸로 매달리며 술래잡기하고 놀고 동네를 쏘다녔었는데 그 모든 게 지금 어른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위험하다. 물론 아이들이 사고를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은 최대한 막아줘야겠지만 자칫하면 맞벌이 부모 아래 크는 우리 아들은 평일 방과 후 집에서 게임하거나 학원에 가 있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선이라는 게 참 애매하다. 


 인도를 걷다가 느닷없이 돌진한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고, 학교 안에 있다가 무작위 총기난사에 희생될 수도 있는 세상. 그런 뉴스들을 너무 쉽게 반복적으로 접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각 상황마다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사고들을 떠올리면 인간이 자유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가 없다. 어느 선을 그을 것인가는 각자의 몫, (어린이의 경우) 부모의 몫일 텐데 나 말고 아이를 대신해 선을 그을 때는 때로 너무 예민해진다.  

 

 아이가 미취학 아동이었던 시절에는 당연히 애를 끼고 다녔는데 소년기에 해당하는 지금은 어떻게 얘가 자연스럽고도 안전하게 행동의 자율성을 키우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그런데 언제나 자유에는 리스크가 있고 각 상황이 디테일하게 다르다 보니 포괄적인 룰을 세우지 못하고 그때그때 고민하고 마이크로하게 통제하는데 이런 내 방식이 아이를 너무 타인의 상황판단에 의존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할까 봐 또 고민이 된다.


 안전의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부여될 수 있는 여러 제한들이, 그로 인한 부작용이 더 크지 않은 수준에서 그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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