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며 야근과 주말근무를 달고 사는 남편은 두 번 진지하게 육아휴직을 시도했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리고 이듬해 내가 복직할 무렵 또 한 번. 직속 임원과 인사상담까지 했지만 그때마다 '지금은 바쁘니까, 커리어에 중요한 시점이니까, 새로운 업무가 있으니까, 연말에, 내년에,...'라는 식으로 붙잡혔다. 그래서 올해 또 남편이 '나 진짜 휴직할까'라고 중얼거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기 때문에 휴직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 중 누군가가 집에 있으면 좋은 나이이긴 하다. 더 크기 전에 아빠랑 아들이랑 좀 더 밀도 있게 많은 시간을 보내면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우리를 벗어날 때에도 이 시간이 따뜻한 인력으로 작용할 것 같다. 그런 한편으로, 휴직을 한다는 건 수입이 줄어든다는 거니까 당연히 부담이 된다. 그리고 늘상 고생하며 어려운 자리에서 일해온 남편이 지금 휴직하는 것이 커리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됐다. 이 모든 걸 종합해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휴직을 하면 하는 대로 좋고, 안 해도 안 하는 대로 좋은 점이 있고 나는 다 괜찮다고 했다.
그렇지만 사실 '이번에도 휴직 못 하겠지'라는 생각이 내심 있었던지라, 남편이 진짜로 휴직을 확정 짓자 좀 놀랐다. 남편은 아이가 만 9세가 되기 전날, 즉 법상 육아휴직 개시가 가능한 마지막날 휴직원을 냈다. 오우. 만약 법적 개시기한이 초등 6학년이었더라면 미루고 미루다 '애가 6학년인데 무슨 휴직이야'라는 마음에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적정한 기한은 우유부단한 인간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움직이게 해주는 큰 힘이다.
남편이 휴직하고 이제 2주 남짓인데 아직 저녁을 차려놓는다든지 화장실이 반짝반짝 빛난다든지 하는 우렁각시 효과는 미미하다. 남편은 오늘은 신발장, 다음날은 서재, 이런 식으로 치밀하게 치우고 있다며 일단 이렇게 온 집을 자기 스타일대로 재편한 뒤에 부엌을 접수해서 요리를 시작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화장실은 아직 순서가 안 됐다. 참나.
하지만 아들의 정서적 만족감, 나의 심적 안정감 면에서는 효과가 좋다. 아이가 혼자 학교 다니고 학원도 혼자 잘 다닌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남편은 육아휴직 타이틀에 충실하게 아이를 등교시키고, 학원이 끝날 때 마중 나가고, 시간이 빌 때면 같이 열심히 닌텐도를 한다. 그런 일상에 대해 아이는 무척 기뻐한다. 회사에서 하루에 서너 번씩 아이의 전화를 받고, 아이의 준비물이나 갑작스런 잔병치레에 신경을 쓰던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회사에서 아이가 떠오를 때면 순수하게 귀엽고 보고 싶은 마음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저녁시간에 내 재량껏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원래 퇴근 뒤엔 집에서 편안히 쉬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실제로 저녁에 나가는 일이 마구 늘어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못 하냐, 안 하냐의 차이는 크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남편이 휴직을 할 게 아니라 정시퇴근만 해도 가능한 일인데 안타까운 노릇이다.
업무스트레스 없이 본인 예체능과 미세 청소와 육아에 몰두하는 행복한 남편과 지내는 것은 야근에 절어있는 남편과의 가정생활에 비할 수 없이 만족스럽다. 아, 물론 회사일로 하루에 14시간 이상 집을 비우던 사람이 이제 회사에 안 가는 것 치고는 가정에서 내가 하는 일의 양이 크게 줄어들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좋은 것에 집중하도록 하자.
나의 육아휴직, 복직과 적응을 거쳐 이제 남편의 휴직이다. 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리고 남편의 복직 후에는 또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겠다. 연말이면 벌써 내가 부서 이동할 텀이고, 나의 얼마 안 남은 육아휴직을 다시 쓸지 그냥 흘려보낼지도 고민이다. 순환보직 체계 안에서도 나에게 좀 더 잘 맞는 분야를 찾아서 거기에 어떡하면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커리어 목표를 어떻게 둬야 할지 등등 그냥 닥치는 대로 해나가던 나의 회사생활에도 좀 더 방향과 질서를 부여할 때인가 싶다.
아무튼, 퇴근 후 항상 아이와 둘이서만 지내던 집에 남편이 있으니 좋다.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도 이 새로운 무드가 주는 여유 때문이겠지. 우리 가족에게 낯선 남편이/아빠가 있는 일상, 하지만 벌써 익숙해진다. 그래서 벌써 아쉽다. 미래를 두려워하는데 시간을 쓰지 말고 지금을 잘 지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