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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수고가 많다

by 민주

우리 집에 매일 아침 오시는 시터할머니는 우리 가정을 굴러가게 하는 일등공신이시다. 영유아처럼 어른 손을 타야하는 건 아니라서 아침밥과 등교시간을 챙겨주시고 설거지, 빨래 등도 해주신다. 이 모든 일이 너무 큰 도움이 되지만, 그보다도 '마음'을 주셔서 참 좋다. 밥 안 먹는 애 살살 달래서 먹게끔 해주시고, '이뻐 죽겠네' 하면서 실컷 사랑을 표현해 주신다.

가끔 외근 등으로 내 출근이 늦는 날 마주치면 몇마디 대화를 나누는데, 감사하게도 항상 나와 우리 아들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주신다.

"00이가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한 건 절대로 안해. 저런 애 없어. 너무 잘 키웠어. 엄마가 직장다니면서 애 키우는게 어려운데 너무 수고했어."

우리 남편도 안 해주는 말을 마주칠 때마다 하셔서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신다.

회사에서 커리어가 잘 나가는 것도 아니요, 애가 두셋 있는 것도 아니요, 엄마표 육아로 뭐 하나를 기깔나게 하는 것도 아니요, 살림을 잘 하는 것도 아니요, ... 이런 식으로 일상에 엷게 패배감이 깔려있을 때 '너무 잘 키웠어. 너무 수고했어.' 라는 타인의 말 한마디는 큰 힘이 된다. 나는 꽤 귀가 얇아서, 그 말을 들으면 '맞아.나 잘하고 있었지.'라고 금세 납득한다.


우리 세 식구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평일 중 열에 아홉은 야근하느라 내가 잠든 뒤에 귀가할 정도로 바쁜 우리 남편도, 가족이 모두 나간 뒤 깨어나 학교와 학원을 돌다가 저녁 6시 되서야 비로소 엄마를 만나는 우리 아들도, 풀타임 근무하고 퇴근해서 아이와 캐치볼하고 마들렌을 굽는 나도 수고가 많다.


남편이 주 3회만 정시 퇴근해도 우리 가족이 훨씬 여유롭고 행복할 텐데 아직도 '정시퇴근'이 이벤트에 가까운 회사에 내 남편이 다니고 있다는 게 슬프고, 또 분노스럽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남편의 집안일 참여도는 0에 가깝고, 그 구멍들은 고스란히 나와 아들의 부담이 되는 현실에 종종 부당함을 느낀다. 이 사람을 착취해서 모종의 성과를 내는 건 회사인데 그 뒷수발은 다 나와 아들의 몫이라는 점이 화가 난다. 남편의 시간과 노력 뿐 아니라 내 시간과 노력, 더 나아가 우리 아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아빠와의 유대감도 엉뚱한 곳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도한 수고와 가족에게 강요되는 희생이 개인적으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해서 들어가는 거라면 좀 나을 텐데, 지금 우리 가족의 고생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고, 일에 헌신하는 등의 직업정신 자체는 훌륭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어느 범위 내여야 말이지.


한스 로슬링('국경없는 의사회'의 설립자 중 한 명)의 저서 '팩트풀니스'에는 그가 모잠비크 오지 마을에서 의사로 일하던 시절, 잠시 봉사 지원을 온 스웨덴 동료 의사가 그의 처방에 대해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라고 질타하자 "이게 여기 우리의 표준 치료야. 정맥주사를 놓는 데는 30분이나 걸리고, 간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위험이 있어. 그리고 나도 가끔 저녁을 위해 집에 가야 해. 가족과 나 자신이 없으면 이 일을 한 달도 못 버틴다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은 세계의 빈곤을 빅데이터와 풍부한 경험을 동원해 서술한 멋진 작품이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에 남은 건 그 개인적인 소회였다. 대의를 위해 일하는 자도 '가족과 나 자신' 없이는 견딜 수 없을진대, 일반적인 직업인이야 오죽할까.


업무시간에는 열심히 일하되, 아이가 아플 때는 부부 중 누구든 당연하게 일을 끊고 올 수 있어서 열이 나는 여덟 살 짜리를 혼자 병원에 보낼 필요가 없고, 평일 저녁엔 온 가족이 주에 두 번쯤 함께 식사를 하고, 개인적인 취미 활동도 하고, 가족 여가활동으로 산책이나 보드게임도 하는 그 정도면 된다. 그럼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수고스럽진 않을 것 같다. 훨씬 많은 이야기와 웃음과 공감을 나눌 수 있겠지.


그래도 우리 회사는 내가 입사했을 무렵에 비해 많이 좋아졌으니까, 희망을 가져본다. 남편 쪽은 (적어도 업무강도와 근무시간 면에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은 슬프지만 이대로 정년까지 살 순 없으니 중이 떠나든 절이 바뀌든 더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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