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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피할 건 없었지

by 민주

내가 복직하며 들어간 부서는 그전 약 15년 간의 직장 생활 동안 두려워 하고, 피하고 싶었던 업무 직군에 속해 있었다.

명백한 갑을관계의 외부기관, 규정과 체계의 미비, 개발도상국으로의 잦은 출장 등등 이 업무가 가진 뚜렷한 특성들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우리 회사같은 순환보직 조직에서 싫은 부서를 영원히 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운이 닿아 15년을 이 업무와 연없이 잘 지내왔는데 결국 복직 때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초반에 느낀 건 '어렵다'는 점.


외국 정부기관과의 협의, 각종 발주와 계약관리 업무,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 등 업무 자체가 방대하고 복잡하고 어려웠다. '이건 어디서 찾아봐야 되지?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의 연속이었다.

이걸 진짜 내가 하는 거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도 많았다. 나는 매우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관련 부서의 모르는 담당자들한테 뻔뻔히 연락하게 되었다. 그들의 친절하고 상세한 답변에 정말 많이 신세졌다.


복직 후 11개월여가 지나 돌아보면, 여전히 (당연히) 그 업무의 범주와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안착한 느낌은 든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 이 일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렇다고 15년간 무서워하며 피해다닐 만큼 시베리아 유형생활급 난이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더 어릴 때 경험해보고 지평을 넓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원래 미지의 공포가 사람을 조여오는 거니까.


업무 특성상 요구되는 정무적 감각, 어떤 일이든 국내외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결정하고 추진해야 하는 부담감, 개인적으로 너무 싫어하는 장거리 해외출장, 종종 마주하는 뚜렷한 규정이나 시스템이 없는 막막함 등등은 여전히 싫다. 최악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업무가 매력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회사의 여러 업무 중에 커리어를 개발하기에 가장 좋은 분야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무적 판단 상황에 대한 나의 극심한 공포와 부담감이 아니라면, 괜찮은 업무일 수도 있다.


우리 아들은 본인이 잘하는 것, 익숙한 것만 하고 싶어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반감이 아주 심하다. 태권도를 처음 등록할 때도, 피아노를 다니기 시작할 때도 몇 달간의 설득이 필요했다. 축구 수업 첫날엔 못 하겠다고, 끊어달라고 했다. 그런 면을 볼 때면 '인생에서 손해보는 특성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날 닮았구나'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래도 잘 어르고 달래 배우게끔 한 것들에 대부분 잘 적응해서 '싫지만 시도해봤는데 괜찮더라' 라는 경험을 쌓고 있어 다행이다.


모든 걸 잘해야 된다는 게 아니라, 뭔가를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사는 삶은 은은한 피로감을 계속 안겨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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