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출장이 싫다.
싫은 포인트야 여럿 있지만,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목과 허리가 안 좋고 탈것에서 잘 못자는 편이라 비행기를 장시간 타는 게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이동을 제외하고 출장지의 업무만 생각하면 당연히 어떤 출장은 좋고, 어떤 출장은 싫다. 하지만 이동은 출장의 필수 전제이고 출장 전후로 업무가 가중되므로 현실적으로 출장 자체가 싫다는 결론이 나온다. 출장 준비, 출장지에서의 업무에 더해 다녀오는 동안 다른 일들이 쌓이는 것까지 생각하면 출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다'고 할 정도의 당위성이 있을 때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유럽 모처로 출장을 다녀왔는데 준비할 때부터 '유럽 출장 좋겠다' 라는 말을을 여러 번 들었고, 그게 참 이해가 안 됐다. 나는 왕복 비행기 24시간 걸려서 3박 5일 일정으로 어딘가에 가는 것은 가서 놀기만 하는 여행이라도 사양하고 싶다. 그런데 하물며 출장이- 심지어 일행 중 윗사람이 넷이었는데-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물론 이왕 3박 5일 출장을 간다면 키토(에콰도르, 2번 경유)나 케이프타운(남아공, 1번 경유)보다는 파리나 런던이 낫긴 하다. 비행 시간이 덜 걸리니까. 하지만 어차피 일하러 가는 건데 거기가 유럽이나 미국이라서 좋다고 할 만큼 해외 땅 밟아보는 게 간절하거나, 출장 일정이 널럴하거나, 같이 가는 사람들과 절친한 사이는 아니므로 그 출장 자체가 좋을 이유는 전혀 없다. 제한적인 출장 경비를 생각하면 키토에 가서 좋은 호텔에 머무르며 업무에 집중하고 양질의 식사를 하는 것이 유럽 출장보다 나을 수도 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출장을 같이 간 일행 한 명이 본인은 비행기를 타는 것에서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열 시간 넘는 비행도 편안하다고 해서 놀라웠다. 그런 사람은 출장이 잦은 업무를 해도 괜찮겠다.
출장 가서 사업 현장을 방문하거나, 메일이나 컨콜로만 접촉하던 업무 상대방을 대면하는 것에는 물론 상당한 장점이 있다. 페이퍼로만 볼 때는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현장의 문제점, 특이사항, 해당 사업의 중요성 같은 것을 가서 보면 훨씬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지난 몇 달간 '저 새끼가?'라는 내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던 업무 상대방을 직접 만나 보니 의외로 말도 잘 통하고 정이 갈 때도 있다. 어떤 출장들이 필요하고 의미도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고 가야하는 출장을 밀어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싫다.
이렇게 출장에 비판적인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세상엔 쓸데없는 출장이 제법 많다. 그리고 출장의 큰 목적 자체는 필요한 일이더라도 의전성 업무가 지나치게 따라붙는 경우도 많다. 대외적인 큰 행사에 참여할 구실이 필요해서 출장 건수를 만들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복합적으로 업무가 잘 되려면 네트워킹이 필요하고 주요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고, 직접적인 관련성은 낮아도 유관성이 있는 참고 사업을 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도나 빈도나 뻔뻔함이 과할 때면 '업무의 탈을 쓰고 해외 가는 거 좋아하는 심보는 88 올림픽 때까지 해외여행이 허가제였던 나라에서 감당해야 하는 인습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에서는 1873년에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출간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선 그보다 100년도 더 지난 1989년에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폭발적인 해외여행 수요를 보면 그 기질에 비해 굉장히 오래 억압되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성장기나 청년기에 개인적으로 해외에 나가볼 수 없던 자들이 그 무형의 족쇄를 못 벗어던지고 아직도 출장의 탈을 쓰고 해외에 나가고 싶어하는 걸까. 이 인간들을 죄다 이코노미에 태워도 이렇게 출장을 다니려고 들까 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출장가서 '저것이 임원의 무게로군' 싶을 정도로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빡빡한 스케줄을 인내심있게, 리더십있게 끌고 가시는 훌륭한 분들도 있다.)
출장이 싫다. 장거리 비행이 싫다. 동기부여 안 되는 출장을 다녀와서 허리와 꼬리뼈가 아플 때면 더더욱 싫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비행기 타는 게 안 괴롭고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출장이면 괜찮으니까 사실 내가 싫어하는 건 출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