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은 적당히 건강한 체질이지만 그래도 어른에 비하면 굉장히 자주 아프다거나 힘들다거나 하며 보살핌을 호소한다. 연어회와 낙지탕탕이를 즐겨 먹는 입맛과 소화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별한 이유 없이 배가 갑자기 아프다며 '아무래도 학원은 못 갈 것 같아'라고 할 때가 종종 있고, 멀쩡해 보이는데 자꾸 눈이 간지럽다고 해서 안과에 데려가니 알레르기성 결막염이라 한 달 넘게 병원에 다니고, 이따금 비염으로 이비인후과에 한 달씩 다니기도 하고, 그런 사소한 병치레들을 겪는다.
그중 나의 회사생활과 병행이 힘든 건 열이나 배탈로 갑자기 아픈 순간들이다. 결막염이나 비염은 병원에서 상태 체크하고 약을 타 먹이며 관리하면 되는 것이라 괜찮은데 '배가 찌르듯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어' 라거나 '너무 어지럽고 열나는 거 같아'라고 하면 갑자기 모든 일상과 일정이 흔들린다.
9월의 어느 수요일 새벽에 애가 부스스 일어나서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린다길래 설마 하면서 바가지를 꺼내서 들이대는 순간 저녁식사로 먹은 것들을 그대로 토해버렸다. 오... 오오... 정리하고 애를 토닥여서 다시 재우면서 머리가 맹렬히 돌아간다. 한 번 토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 내가 출근한 뒤에 애가 일어났는데 학교를 못 가는 상황이면 진짜 곤란하잖아. 오늘 회사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뭐더라? 전일은 못 빼겠다, 오전반차만 쓰고 오후엔 출근해서 이거랑 저거랑 그걸 해치워야지. 그럼 학교는 결석하고 병원 갔다가 친정에 데려다 놓고 거기서 출근하면 되겠네. 등등등.
(이 글을 10월 초에 쓰고 저장만 해뒀는데 네 달여 지난 오늘 읽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바로 어젯밤에 똑같은 일이 있어서 내일 출근과 돌봄에 대해 고민 중이다.)
구식인 우리 남편은 '토했으면 이제 된 거 아니야? 좀 아프다고 학교를 빠져? Latte is horse'라고 시대상에 안 맞는 소리를 해댔다. 코로나를 계기로 우리 사회도 이제, 영혼 깊숙이는 아니더라도 입으로는 '아프면 쉬어야지'라고 비로소 말하게 되었고 특히 어린이집, 학교 등의 시설에서는 이 룰이 꽤 지배적인데 우리 남편은 아직 옛날 사람이다. 아이 등하원을 안 시켜보고, 가정통신문도 안 읽어보고, 아파서 기관에 못 갈 때 휴가나 재택으로 그 공백을 메꿔본 적이 없으니 아직도 본인 학창 시절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라 생각하니 조금 괘씸하다.
그렇게 시작된 애매한 복통과 차를 타면 먹은 걸 모조리 게워내는 구토가 열흘 이상 계속됐다. 열은 없고, 차를 안 타면 큰 문제는 없고, 그런데 입맛이 없어서 잘 못 먹고, 다 나았다며 신나게 우유를 마시더니 토하는 식이었다. 병원에 가 보면 아직 장 소리가 안 좋고 가스가 차 있다며, 장염 후 회복이 덜 된 상태로 보인다고 해 딱히 더 해줄 것도 없이 그냥 완전히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상태.
누구나 걸릴 수 있는 흔한 장염이고 증상이 심한 것도 아닌데도 이 아이의 몸이 아픈 순간 그간 잘 구축했다고 생각한 일상이 소용없어진다. 아픈 아이에게는 집과 돌봄이 필요하지, 학원은 의미가 없으니까.
학교 다녀와서 학원은 가지 말고 집에서 쉬도록 한 뒤 죽을 배달 시켜 주겠다고 하는데 '00이나 ㅁㅁ네처럼 나도 할머니 중 한 명이 우리 집 근처에서 영원히 살면서 날 보살펴주면 안 돼?'라고 물어본다.
'할머니들도 할머니 인생이 있으니까 너를 보살펴 주기 위해 사는 곳을 영영 떠나실 순 없어.' 할머니들은 손주를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그런 전담 케어는 사랑만의 문제는 아니니까.
우리 회사는 육아를 위한 여러 제도를 잘 갖춘 편이고, 그런 제도들이 사장되지 않고 실제로 잘 활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과 육아를 양립하는 것이 종종 쉽지 않다. 사내어린이집, 유연근무제 등 육아를 지원하는 각종 제도를 둘러싼 세대 갈등도 있다. 이 세대 갈등에서 나는 기성세대이고 '왜 애 있는 직원만 저런 혜택을 누리냐'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젊은 세대라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제도들이 여러 진통과 난관을 헤쳐나가며 도입되고 발전되는 걸 지켜본 바, 나로서는 우리 사회의 질적 발전을 체감하는 구체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이걸 욕하다니!
지난주에는 목이 아프고 열이 난다고 연락온 아이에게 처음으로 혼자 소아과에 가라고 했다. 아이는 혼자서 진료를 잘 받았고 나랑 통화한 뒤 약도 잘 먹었지만, 따로 포장된 해열제 먹는 건 놓쳤다. 급한 일을 끝내고 집에 가보니 아이는 고열에 들떠 벌개진 얼굴을 하고 소파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근처에 할머니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화성탐사를 하겠다고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기술과 풍요를 갖춘 세상에서 맞벌이 육아가 기댈 수 있는 최선의 안식처가 조부모인가..? 나라에서 나 대신 아픈 애를 봐달라는 소리는 아니다. 재택근무나 단시간 근무가 보편적으로 가능할 정도의 생산성 향상이 분명 이뤄진 거 같은데 여전히 노동시간이 길고 사무실에 사람을 매어 놓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애가 더 커서 덜 아프고 내 손을 덜 타게 되는 게 나에게는 제일 빠른 해결이겠지. 어쨌든, 내 반드시 있는 제도라도 최대한 활용하리라 다짐해본다.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애 어릴 때 업무환경이 지금 같았으면 정말 일하면서 애 키울 만 했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