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수지네는 어디로

by 민주


우리 아들은 세상 모든 동물을 사랑하지만 나는 동물에 일절 관심이 없다. 그저 아이가 좋아하니까 아쿠아리움과 동물원에 백 번쯤 방문하고, 산으로 들로 갯벌로 계곡으로 채집 활동을 다니고 동물에 관련된 책이나 영상을 같이 볼 따름이다. 자연과 동물에 대한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은 보다 보니 의외로 재밌지만 실물을 만지고 관찰하는 데에는 여전히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영상도 ‘살아있는 지구’나 ‘나의 문어선생님’, ‘옥토넛 바다탐험대’처럼 자연에서 살아가는 동물을 관찰하거나 극화한 것은 재밌지만 ‘동물농장’은 별로다. 그러니까 나는 동물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쪽이 아니라 생태계의 다채로움, 아름다움, 무상함을 접하면서 경이를 느끼는 쪽이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을 직접 키우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아이가 뭔가를 키우도록 가끔 허락하는데 그건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꽃무지애벌레처럼 수명이 길지 않고 우리나라 자연에 방생해도 무방한 개체들이다. 적당히 키우다가 ‘얘도 이제 자연에서 짝짓기 하고 실컷 움직여봐야지’라고 아들을 설득해서 내보낸다. 그렇게 하기 전에 죽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아무튼 그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지점이다.


올해는 아이가 ‘장수지네’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대번에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찰나에 아이가 치고 들어온다.

“엄마, 들어봐. 장수지네는 우리나라 토착종이고 살아있는 먹이 말고 사료도 잘 먹는대. 엄마가 먹이로 밀웜 들이는 건 안 된댔잖아. 장수지네는 괜찮아.“

듣다 보니 상당히 논리가 있다. 나에게 커스터마이즈된 설명이다.

“그런 걸 파는 데가 있단 말이야? 그리고 키울 때 엄마는 손 안대도 되는 거지?“

“내가 정브르 책에서 파는 곳 봤어. 당연히 내가 알아서 키우지. 엄마는 신경 쓰지 마.“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처음엔 반사적으로 싫은 반응이 나왔지만 내 입장에서 사슴벌레나 장수지네나 어차피 혐오 계열이긴 마찬가지이긴 하다.

“그럼 엄마를 설득할 수 있도록 네가 조사를 잘 해보고, 조사한 내용과 잘 키울 수 있다는 다짐을 정리해서 발표해 봐. 가족회의를 해서 결정하자.”

일말의 교육적 효과를 노려서 과제를 주고, 챗지피티와 Gamma를 활용해서 아주 기초적인 PPT도 만들게끔 했다. 그 과정에서 내 관리감독이 9할을 차지하긴 했지만 어쨌든 마지막 장에 본인의 증명사진과 장수지네 사진을 나란히 배치하고 ‘책임감 있게 키우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넣은 것은 높이 샀다. 아직 생성형 AI들이 생성자의 능력을 확연히 뛰어넘는 자료는 만들기 어렵고, 특히 ppt처럼 이미지와 문서가 병합된 건 더더욱 어렵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쨌든, 그리하여 우리 집에 장수지네가 들어오게 되었다.

다행히 분양하는 가게에서도 장수지네는 사육 난이도가 아주 낮고, 수직 벽을 못 오르기 때문에 핀셋으로 핸들링할 때만 주의하면 사육장을 탈출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엄마, 봐봐. 너무 귀엽지 않아? 몸통이 어두운 초록색인 게 장수지네의 특징이야.”

아니, 전혀 귀엽지 않아. 하지만 아이가 사육장을 자기 방에 모셔다 놓았고, 음습한 걸 좋아하는 지네는 대부분 은신처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맨손으로 만지지 말고, 사육장에서 꺼내지 말라는 주의사항만 거듭거듭 말해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사육장을 조용히 오랜 시간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뚜껑을 열어 집게로 헤집어 보더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엄마, 장수지네가 안 보여.”

”에이, 그럴 리가.“

아이가 집게를 사용하기 전에 사육장 뚜껑이 잘 닫혀 있는 건 나도 봤고, 사육장의 벽면 윗부분에 좁고 긴 숨구멍들이 일렬로 나있는 외에는 트인 곳이 없었다. 이 작은 사육장에서 왜 장수지네를 못 찾지,라고 생각하며 나도 집게로 흙과 은신처용 나무껍질을 뒤집어 보았다.

“진짜 없네?”

와, 뭐라 할 말이 없다.

“너 뚜껑 열어놓은 거 아니야!?”

아이는 억울해했고, 나도 뚜껑이 닫혀있는 걸로 봤었지만 도대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우리의 친구 네이버에 ‘지네 탈출’로 검색하자 비슷한 사례들이 나왔다. 며칠째 지네가 안 보여서 사육통을 탈탈 털어봤는데 사라졌다, 뚜껑이 닫혀있었는데 없어졌다, 틈이라고는 숨구멍뿐인데 없어졌다…

“사장님이 사기 쳤나?”

숨구멍 부분을 손톱으로 벌려보니 약간의 신축성이 있었다. 그럼 지네가 저 틈을 비집고 빠져나왔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그런 적이 있다니, 그래, 그럴 수 있나 보다. 하지만 분명히 수직 벽은 못 오른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아이가 뒤늦게 기억나는 단서가 있다고 했다. 자기가 먹이 주면서 관찰할 때 장수지네가 은신처를 받침대 삼아 거기서 몸을 번쩍 세우더니 숨구멍을 움켜쥐길래 얼른 집게로 다시 밀어 넣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어오를 수는 없지만 접영 하는 수영선수처럼 허리 힘으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뭐 그런 말이다. 그 이야기를 내가 미리 들었다고 해서 그 좁은 틈을 힘으로 벌리고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 이랬거나 저랬거나 별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럼 장수지네는 사육하면 안 되는 동물로 안내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장수지네는 이미 없는 게 확실하고, 우리로서는 막을 방법도 없었다는 걸 알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비록 지네가 우리 집 어딘가를 활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셈 치기로 했다. 우리 아들은 그 지네를 포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지만, 그런 방법은 없다. 작은 사육통 안에서도 지네는 아주 재빨랐으니까. 모든 마디가 유연하게 휘어지며 갈지자로 움직이는 몸놀림이 기술적, 기계적으로 경지에 이른 모습이다.

제발, 그 빠르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하수구라든지 우수관이라든지 아무튼 내가 모르는 어떤 틈인가로 빠져나갔어라. 얼마 전에 '개구리가 될 때까지만' 키우려던 올챙이가 다리가 돋자마자 탈출한 뒤 집에 파리가 들끓는 무시무시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네가 우리집을 완전히 벗어났기를 바랄 뿐이다. 개구리는 공깃돌 같은 모양새지만 지네는 좀 더 납작한 편이고 몸짓이 유려하니까… 개구리와 다르게 탈출하자마자 우리 집에서 아예 나갈 수 있었겠지? 그렇게 소망하고 나는 그냥 이 문제를 덮었다.


장수지네몬, 먼 세상으로 나가라.





keyword
이전 12화엄마, 나 사춘기인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