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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 Apr 28. 2024

엄마, 나 사춘기인가봐

 며칠전, 소파에 엎드려 책을 읽던 아이가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엄마, 사춘기가 되면 사람이 못돼져?"

 아이가 보던 책은 '정재승의 인간탐구보고서'시리즈 중 사춘기를 주로 다루는 4권이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인간세상을 관찰하기 위해 인간들 틈에 섞여사는 스토리를 통해 인간의 몸과 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인데 우리 아이에겐 아직 수준이 어렵지만 만화 형태라 그런지 (내용 파악을 못하는 채로) 곧잘 읽는다.

 "못돼진다기 보다는 고민이 많아지고 예민해지고 이런저런 불만이 생길 수 있어. 그러다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나빠질 수 있지." 

 사춘기란 뭘까. 나도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인생과 사회에 대해 비판의식이 솟구치던 시기가 나름 있긴 했지만 그것은 내면적 고뇌가 주를 이루었고 겉으로 표출해내는 질풍노도의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사춘기를 제대로 달리면 내가 많이 당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초등학교 2학년으로 어린 데다 여자애들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남자애들과 비교해도 어수룩한 편이라 한참 먼 일로 느껴지긴 한다.그래도 가끔씩 '너 나중에 화난다고 문 쾅 닫으면 기숙학교 가는 거야. 우리집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문쾅기숙이다.' 라는 식의 조기교육을 시키고 있긴 한데, 실제 상황에서 미리 심어놓은 이 암시들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럼 엄마, 내가 사춘기가 됐는데 막 엄청 기분이 나빠서 집에서 화내고 싶으면 어떡해?"

 "... 참아야지? 사춘기 아니래도 사람이 다 이것저것 맘에 안 들거나 힘들 때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집에서 화를 내면 안되는 거야."

 "그러면 내가 사춘기 때 너무 화가 나거나 답답하면 나가서 산책을 하고 오는 건 돼?"

 "당연하지. 그렇게 바람쐬면서 기분을 푸는 건  너무 좋은 방법이야. 어휴, 어쩜 그렇게 좋은 생각을 다 했어."

  나의 진심어린 칭찬에 아이는 고뇌가 풀려서 다시 책에 집중했다. 이런 귀여운 무지렁이가 6년이 지나면 진짜 그 전설의 중2가 된단 말인가. 그저 오늘과 내일의 연속이 쌓이면 6년 뒤가 되는 것이고 어제와 오늘은 크게 다를 게 없건만, 언제 그런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걸까. 


 하긴, 이번주에 갑자기 아이가 달라진 걸 느낀 순간이 있었다. 아이 혼자 샤워 중이었는데, 머리를 잘 헹궜나 확인하러 화장실에 들어온 나에게 자신의 중요부위를 보면 안된다며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렸다. 거품이 많이 남아있어서 머리를 헹궈줘야 하는데 수건을 두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기쁘게 남편을 들여보냈다. '이젠 내가 샤워를 도와줄 나이가 지났나봐~ 9살이니까 그럴 때도 됐지~' 

 얼마전만 해도 목욕할 때 자꾸 불러대며 옆에 와서 이것 좀 봐라, 이것 좀 같이 하자, 이 얘기 좀 들어봐라 라며 불러대더니 하루아침에 새로운 행동방침을 따르는 게 신기했다. 내가 보기엔 마음 깊이에서 부끄럽거나 이제 컸으니까 이럼 안 된다고 생각한다기 보다는 어디서 얻어들은 말을 열심히 따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1학년 가을 무렵부터 길을 걷다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주변에 사람이 없어도 깜짝 놀라며 밖에서 이러지 말라고 한다. 여전히 집에서는, 특히 밤에 자기 전에는 꼭 안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언젠가는 집에서도 이런 말 하지 말라고 할 때가 올까. 착실히 커가는 게 기특하지만 조금씩 떠나가는 발자국이 섭섭하기도 하다. 독립심은 갖추되 사랑을 표현하는 마음은 여전하면 좋으련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책읽기로 돌아갔던 아이가 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비장하게 외쳤다.

 "엄마, 나 사춘기인가봐!"

 이게 무슨 헛소리람... 아무리 세상이 빨라져도 만7세에 사춘기는 올 수가 없거니와 맨날 손톱 밑이 흙으로 시꺼매지게 땅파고 다니는 애가 사춘기라니. 화가 날 때 산책해도 되냐고 물어보는 애가 사춘기라면 중2병은 이렇게나 무서운 명성을 떨치지 않았을 것이다.

 들어보니 읽고있던 책의 말미에 '사춘기 셀프 체크리스트'가 붙어있었는데 자기가 거기에 많이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궁금해서 나도 들여다보였다.

 "여기 첫번째도 나 맞고, 두번째도 맞고, 세번째도 맞고 나랑 맞는 게 엄청 많아."

 첫번째는 '친구들이 산 옷은 나도 사고 싶다'였는데, 주5일 태권도 티를 입고 등교하고 토요일엔 축구복을 입는 애가 이런 말을 하니 참 당황스러웠다.

 "친구들 옷 중에 어떤 게 갖고 싶었는데?"

 "나도 OO점핑(줄넘기 학원) 티 입고 싶었어."

 그봐. 네가 무슨 사춘기야. 운동 유니폼 매니악같으니라고.

 두번째는 '좋아하는 이성 친구가 생겼다.'였는데 이건 정말 의외라서 물어보았다.

 "너 좋아하는 여자 친구 있었어?"

 "에에에!?? 아니이!!!"

 "체크리스트 두번째 꺼 네 얘기라며."

 "... 이성친구가 무슨 뜻이야?"

 "다를 이, 성별 성이라서 네 경우엔 여자인 친구를 말하는 거야."

 "그럼 그건 아니야."

 아아, 이 어설픔. 체크리스트를 풀어보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사춘기라고 외치지만 1, 2번부터 대차게 틀려버린 이 애매함이 정말 사랑스럽다. 나머지 중에는 '나도 모르게 부모님꼐 자꾸 짜증을 낸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몸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이 커졌다' 등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법한 항목들도 여럿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유년기라는 시절은 성별에 대한 인지도 어설프고, 정형화되지 않은 고민이 있고, 어른들보다 더 깊게 더 자주 세계의 신비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하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크게 변화할 수 있는 마법같은 시간이다. 그 마법이 끝나거나, 혹은 꺾이는 지점에서 사춘기가 시작되지 않나 싶다. 아이가 사회화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어설프게 여자, 남자를 기준으로 능력이나 성격을 구분한다든지 남들 앞에서 사랑한다 말하는 게 부끄럽다고 여긴다든지 - 아직 우주처럼 넓고 관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기에 사회화를 통해 일단 틀을 밀어넣고 인지나 발달이 그 모양대로 뒤따라가도록 하는 것 같단 생각도 든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 속에 어떤 변화들이 오더라도, 오늘 사랑하는 만큼 내일도 사랑하는 날이 쌓여서 독립적이되 돈독한 사이로 지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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