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위한 변명
수없이 많은 시험을 치렀지만, 시험을 보다가 잠시 졸았던 적은 대입 학력고사 3교시 수학시간이 유일했다.
시험을 망쳤지만 왠지 억울함이나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다.
지겨운 항해는 끝났고 아무 뭍에든 내리면, 거기서부터 어디론가 다시 출발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시험 다음날 오후 혜화동으로 그녀를 만나러 갔다.
3월의 그날 이후에는 통화조차도 한번 한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약속장소에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균관대학교로 가는 이면도로에는 옛 고려대병원인 우석병원이 있었고 큰길과 그 사이에 촛불잔치라는 카페가 있었다. 그 지역에서 카페를 다닐만한 나이를 보내지 않았던 사람들은 몇 년 후에 나온 노래의 제목으로 아는 단어이다.
당시 젊은이들이 찾는 카페는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되어있고 조명이 어두운 분위기가 많았는데, 혜화동의 촛불잔치는 그중에서도 조명이 어둡기로 유명한 카페였다. 가게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촛불로 조명을 하는 곳이었다.
그녀가 먼저 와있었다.
테이블 건너에 앉은 사람의 얼굴도 희미하게 보이는 그 어둠을 지금도 기억한다.
바로 전날 대입시험을 쳤던 고등학생들 답게 '시험은 잘 봤니?' 정도는 서로 물어봤을 법도 한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둘 다 말없이 무언가를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마치 어제도 만났었던 연인처럼.
어색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만남이 세 번째의 만남이고, 두 번째 본 것이 지난 3월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매일 만났다.
가능한 거의 모든 날과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만나서 하는 일은 똑같았다. 무언가로 저녁을 먹고 술 마시고 음악 듣고.
처음에는 마주 보고, 만난 횟수가 적당히 많아진 뒤에는 나란히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말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좁은 칸막이와 음악과 따뜻한 침묵으로 둘러싸인 시간 안에서 내 손을 잡은 채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때로는 거리를 걸었다.
겨울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팔짱을 끼거나 내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을 보면, 여자가 남자한테 매달려 가는 것 같아."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기 위해 장갑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결코 치열했다고 말할 수 없는 십 대를 끝내는 겨울에 나는 왜 그렇게 지쳐있었을까.
그녀는 평생 처음 느껴본 내 방이었다.
따뜻한 이불이었고 욕조였다. 시절이 그때여서인지 나이가 그 나이여서이었는지, 미는 것도 없고 당기는 것도 없었다.
볼 한번 제대로 비벼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내 안에 있었다. 또 내가 그녀 안에 있었다.
처음 우이동 언덕길에서 빨간 코트가 올라오던 그 순간 이후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갈때까지 변하지 않던 사실, 언제나 그녀를 만나기 오분 전부터 가슴이 슬며시 뛰었다.
처음 가져 본 내 것의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등학교 3학년은 11월에 대입시험을 마치면 사실상 학교를 졸업한 것과 같다.
12월 중순까지 학교를 건성으로 다니다가 방학을 하고 그것으로 고교시절은 끝이 난다.
나는 진공상태와 같았던 그 시간들을 그녀와 함께하며 채웠다.
어쩌면 그 진공의 병 속으로 불안함이라는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꾹꾹 눌러 채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월 중순쯤 되자 나의 안식과 나의 회피는 끝이 났다.
어느 날 담임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